[Saturday] 취업시즌 대학가 ‘자소서 포비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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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준비생인 연세대 4학년 박모(26)씨는 지난달 내내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 취업하려는 기업들이 요구하는 자기소개서(자소서)를 기한 내 작성하느라 새벽까지 깨어 있곤 했다. 지난달 19일만 해도 그랬다. 오전 4시까지 자취방에서 자소서를 쓰다가 잠시 눈을 붙인 뒤 오전 8시쯤 깨어난 박씨는 아침식사는커녕 세수만 겨우 하고는 부리나케 학교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오전 9시 자소서 스터디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취업준비생 6명이 함께 각자 써 온 자소서를 돌려 보고 서로 고칠 점을 지적했다. 2시간여의 첨삭이 끝나자 하나둘씩 각자의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지난해 하반기 공채에서 취업에 실패하고 올해 재도전 중인 이모(26·여)씨는 “이번에도 서류에서 줄줄이 떨어지면 대학원에라도 가야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오후 동안 강의실에서 수업을 들은 박씨는 저녁식사 후 다시 학교 밖 카페로 향했다. 이번엔 기업들의 ‘인·적성시험’ 스터디에 참여했다. 오후 9시,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학교 도서관을 찾았다. 마감이 임박한 자소서를 쓰기 위해서다.

 박씨는 “대기업 서류전형이 몰려 있는 지난 9월부터는 자소서의 ‘늪’에 빠져 하루하루 사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그는 “지금까지 15곳 정도 지원했는데 서류 합격한 곳이 30%밖에 안 된다”며 “서류전형을 넘어야 전공 지식·포부를 밝힐 기회가 있을 텐데, 첫 관문부터 진이 빠진다”고 말했다. 그나마 박씨의 서류전형 합격률은 높은 편이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이달 구직자 1174명을 조사한 결과 평균 서류 합격률은 14.5%에 그쳤다.

 본격적인 기업 채용 시즌을 맞은 요즘 대학가에선 ‘자소서 포비아(공포증)’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취업의 첫 관문인 서류전형에서 번번이 좌절하는 취업준비생들이 많고 핵심 서류인 자소서에 대한 부담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박씨 등 취업준비생들은 “기업들이 요구하는 자소서 분량이 크게 늘고 난이도도 높아졌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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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가들은 달라진 취업 트렌드를 원인으로 꼽았다. ‘스펙 초월 채용’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일부 기업은 토익·토플 등 공인 어학점수 입력란을 없앴다. 대신 자소서 항목을 까다롭게 재구성했다. 자소서를 통해 직무 능력과 조직 적응력 등을 미리 파악하기 위해서다. 자소서에 인문학적 소양과 감수성을 드러낸 ‘스토리텔링형’ 에세이를 요구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김종필 건국대 인력개발센터장은 “지원 동기, 성장 과정, 성격의 장단점 등을 열거하는 수준에서 벗어나고 있다”며 “일부 기업은 그 업계·회사에서 10년은 근무해야 알 만한 전문적인 내용을 묻기도 한다”고 전했다.

 그만큼 준비가 어려워졌고 심리적 부담도 커졌다. 지난 3월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구직자 472명을 설문한 결과 89%가 “자소서 항목이 너무 많아 어려웠다”고 답했다. “항목이 너무 어려워 입사 지원을 포기한 경험도 있다”는 응답자가 75.6%에 달했다.

 지난달 신한은행에 지원하려던 고려대 4학년 하모(26·여)씨는 자소서를 제출하지 못하고 전형을 포기했다. 1만 자에 육박하는 방대한 분량, 난해한 질문에 “기가 질렸다”고 했다. 신한은행의 자소서 2번 문항은 ‘거주지 인근 영업점을 방문하고 본인이 생각하는 영업장의 영업환경과 타 은행보다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전략을 기술하라’고 주문했다. 하씨는 “총 4개 문항에 모두 답하면 A4용지 10장 분량인데, 이건 한 학기 기말고사 리포트와 맞먹는 것”이라며 “신한은행에만 매달리다가 다른 기업들까지 놓치겠단 생각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LG생활건강에 지원했던 박씨는 ‘본인이 영업사원이라고 가정하고 생활용품·화장품 등 사업을 선택해 현재의 옴니채널 상황과 영업전략을 분석하라’는 질문에 답하느라 애를 먹었다. 박씨는 “한 기업의 자소서 한 항목에 리포트 하나 수준의 공을 들였다”며 “면접도 아닌 서류 단계에서 과한 전문성을 요구하는 것 같아 기업이 구직자들의 아이디어를 빼앗으려는 건 아닌지 의심까지 들 정도”라고 말했다.

 고려대 4학년 한모(25·여)씨는 8000자 분량의 현대해상 자소서를 쓰다가 코피를 흘린 적이 있다고 했다. “2주 동안 10개 넘는 자소서를 쓰느라 밤을 새우다시피 했는데, 하루하루 거대한 프로젝트를 끝내는 느낌이었다”며 “에너지드링크를 마시며 버티다 보면 서서히 날이 밝아오는데 이게 청춘인가 싶어 처량한 기분마저 들었다”고 말했다.

 잡코리아 조사에 따르면 구직자들은 평균 15회 정도 기업 공채에 지원한다. 기업에서 요구하는 자소서 분량이 3000~1만 자임을 감안하면 서류 접수가 몰리는 보름 정도의 기간에 한 사람당 A4용지 40~120장 분량의 자소서를 써야 하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내용이 과장되고 부실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상반기부터 취업을 준비해 온 이모(27·고려대 4학년)씨는 SK텔레콤의 자소서 문항을 보고 고민에 빠졌었다고 한다. ‘주어진 자원만으로 달성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기존 방식과 다른 방법으로 시도하거나 본인이 주도해 과감히 추진했던 경험에 관해 쓰라’는 문항이었다. 졸업 전까지 학생회 임원, 공모전 입상 등 다양한 경험을 했다고 자부했지만 딱 맞는 사례를 찾기 어려웠다. 이씨는 “독특하고 차별화된 성과를 써야 할 것 같다는 압박감에 실제 활동보다 부풀리고 싶다는 유혹이 들었다”고 말했다.

 취업준비생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전형 과정에서 겪는 열패감·자괴감이다. 박씨는 “서류전형에서 자주 고배를 마시니 대학 생활을 잘 못한 건지, 내가 매력적인 사람이 아닌 건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고백했다.

 지난해 하반기 20여 개 기업의 공채에 도전했다 고배를 마시고 올해 상반기 삼성그룹 계열사에 합격한 강모(26·여)씨는 “요즘 기업들은 대학 졸업생이 인턴 경험부터 국제적 감각까지 모든 분야에 만능이 되길 원하는 것 같다”며 “지식과 능력·경험도 중요하겠지만 학생으로서, 젊은이로서의 가능성·패기를 보다 더 평가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신진 기자 jin@joongang.co.kr

[S BOX] 묻지마 스펙 쌓기 그만 … 가고 싶은 기업 골라 집중 연구하라

대학가에 퍼지는 ‘자소서 포비아’를 놓고 전문가들은 급변한 기업의 채용 트렌드를 근본 원인으로 짚었다. 대규모 정기 공채보다 소규모 수시 채용을 선호하는 추세가 확산되면서 서류 단계부터 엄격하게 후보들을 선별 한다는 것이다. 취업포털 인크루트 서미영 상무는 “예전엔 면접 과정에서 테스트하던 심화 질문이 첫 관문인 서류전형의 자소서로 내려오고 있다”고 말했다. 취업준비생이라면 자소서를 사전 인터뷰로 생각하고 가능한 한 충실히 대비해야 한다. 서 상무는 “지원하는 기업에 어떤 사람들이 모여 어떤 일을 하는지, 경쟁사는 어디인지 등을 꼼꼼히 탐색하라”고 조언했다.

 무작정 어학성적·자격증·공모전에 몰두하는 ‘묻지마 스펙 쌓기’, 일단 응시하고 보는 ‘양치기 지원’은 시대에 동떨어진 전략이다. 김종필 건국대 인력개발센터장은 “30개 기업의 자소서에 쏟을 노력을 자신이 정말 간절히 원하는 5개 기업의 자소서에 투자하라”고 말했다. 자소서의 분량이 늘고 문항이 까다로워진 만큼 ‘선택과 집중’이 긴요하다는 것이다. 김 센터장은 “기업이 원하는 건 ‘베스트’ 인재가 아니라 그 회사에 정말 오고 싶어 하는 인재라는 점을 잊지 말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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