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그물에 걸린 고기〃를 놓친 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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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송치 57일만의 역전 드라마는 경찰수사가 아직도 육감수사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경찰은 사건발생직후인 작년9월26일 정군을 용의자로 보고 혈흔이 있는 문제의 시트커버를 압수해놓고도「그물에 들어온 고기를 놓치는」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이것은 바로 전날인 9월25일, 숨진 상은양의 오른쪽 귀밑에서 나타난 치흔이 감정결과 장군의 것으로 통보됨에 따라 간부들이『특별한 것이 없으면 다른 것은 수사할 필요 없다』고 지시했기 때문.
치흔에 집착해 장군을 범인으로 판정함에 따라 경찰은 가장 기본수사인 시트의 감정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치흔 감정결과가『사망 수십 분 또는 수 시간 전에 생긴 것』이란 모호한 것이었는데도 경찰은 이날 저녁 장군이 상은양을 만났었다는 사실만으로 범인으로 지레 짐작해 버린 것.
이때부터 경찰은 장군이 범인임을 뒷받침할 증거를 확보하기 시작했으니 육감으로 범인을 잡아놓고 이에 꿰맞춘 결과가 되고 말았다.
장군을 범인으로 단정짓기 전에 범인일 가능성을 놓고 수사했다면 반드시 범인이 아닐 가능성도 수사했어야하지 않았을까.
검찰의 구속보류 후 경찰이 일손을 놓고 수사본부를 해체하는 등 보강수사를 포기한 것도 잘못이다.
당연히 경찰은 이때부터라도 원점에서 재 수사를 하면서 한편으로 장군에 대한 보강증거를 확보해야 했었다.
이때 경찰이 내세운 택시운전사 등 증인도 경찰이 궁지에 몰릴 때만 나타나 석연치 않고, 증언내용도『장군과 비슷하다』는 것이 아니라『장군이다』고 확언했다는 점이 오히려 신빙성을 줄여주고 있다.
검찰은 송치 후 기록검토만으로『장군이 아니라 정군』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 만큼 장군의 혐의점은 설득력이 없었다.
한 검찰관계자는▲전화를 걸어 준 여자가 범인과 인척 등 극히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을 리 없고 ▲화려한 차림을 즐기는 상은양이 당시에는 가벼운T셔츠차림에 샌들을 신은 점으로 보아 택시를 탔다는 것은 이상하며 ▲장군이 이날 밤9시쯤 상은양을 목격자가 많은 아파트 앞까지 바래다주고 헤어진 뒤 30분만에 다시 불러내 살해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고 ▲장군이 스스로 30대 여자목소리를 흉내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송치 즉시 다른 범인을 찾게됐다고 설명했다.
또 법의학의 한 권위자는 치흔의 깊이로 발생시간을 사망 전「몇분」까지 정확히 알아낼 수 있다고 밝히고 있어 초동수사 과정에서 좀더 전문적이고 권위 있는 감정을 했더라면 장군은 쉽게 혐의를 벗을 수도 있었다.
검찰은 정군을 수사하며 거짓말탐지기·녹음·녹화 등으로 심증을 굳히고 증거보강을 했다.
아직까지 강력사건 수사에서 녹화가 등장한 적이 없어 과학수사의 한 발전이다.
경찰도 이를 계기로 장비의 현대화·인력의 고급화로「육감」「고문」등 구시대의 먼지를 털고「제2의 장군」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오홍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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