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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 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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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6월의 베이징(北京)은 숨을 죽인다. 아물지 않는 1989년 6.4 사태의 상처 때문이다. 수백에서 수천…. 얼마나 많은 넋이 스러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천안문(天安門) 정도가 알까.

"비겁함은 비겁한 자들의 통행증이고

고상함은 고상한 자들의 묘비 명이다…

너에게 고하노니, 세계여

나는 믿-지-않는다

네 발 아래 천 명의 도전자가 있다면

나를 천한 번째 도전자로 생각하라…."

중국의 젊은이들을 천안문 광장에 세웠던 시 '대답(回答)'이다. 이 시가 처음 등장한 것은 76년 4월 5일의 청명절(淸明節) 즈음. 그해 초 사망한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애도하는 인파가 천안문에 몰렸고 광장엔 사인방(四人幇)을 성토하는 시가 나부꼈다. 이른바 '베이징의 봄'으로 불리는 4.5운동의 복판에 이 시는 자리했었다.

그로부터 13년 후인 89년 4월 15일. 정치개혁을 시도했던 후야오방(胡耀邦)이 죽자 이 시는 부활했다. 젊은 영혼들은 천안문 광장에 모여 '대답'을 노래하며 민주화를 외쳤다. 결과는 수백에서 수천의 주검으로 이어졌다.

이 시를 지은 베이다오(北島.56.본명 趙振開)가 천안문 사태 16주년이던 6월 4일 서울의 한 강연회에 섰다. 16년의 망명생활 기간 7개국을 전전 중인 그는 자신을 "국가에서 해고 당한 사람"이라고 했다. 필명 베이다오는 '북쪽 바다에 있는 침묵의 섬'을 뜻하는데 이젠 '표류하는 섬'이 됐다고 자조했다.

엘리트 중학생에서 홍위병과 철공소 노동자를 거치며 잇따른 저항의 시를 발표해 온 그에겐 '중국의 솔제니친' '저항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93년부터는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된다. 최근 광주의 5.18 묘역을 다녀왔다는 그는 "천안문 광장에도 6.4 기념탑이 건립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베이다오의 바람은 요원해 보인다. 중국 당국은 '봄.여름 교차 시기의 정치풍파'라는 천안문 사태에 대한 정의에서 한 발도 물러섬이 없다. 오히려 최근엔 외국 언론인을 간첩 혐의로 체포하는 등 언론 통제와 반체제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 관리의 망명도 이어져 '거꾸로 가는 중국'이란 말마저 나온다.

베이다오의 저항도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유상철 국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