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살인용의자 잡은 발목 사진 한 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2면

50대 남성이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느낌이 이상했다. 26년차 베테랑 형사인 류중국 강력팀장의 직감이었다. 서울 강서경찰서 강력계 7개 팀 전원이 비상소집됐다. 건설시행업체인 K사 사장 경모(59)씨가 서울 방화동 사무실 앞에서 흉기에 수차례 찔려 살해당한 건 3월 20일 오후 7시20분. 그 순간부터 범인을 쫓기 위한 200일간의 추적이 시작됐다.

 사건 발생 3개월이 지난 7월 1일. 그때까지 사건 현장 주변의 폐쇄회로TV(CCTV) 120개를 뒤지고 인근 1457세대를 탐문수사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3월 3일부터 20일 사이에 자전거를 타고 매일 현장 근처를 맴돈 남성이 있었다는 정도만 파악한 상태였다. 사건 당일 CCTV에 찍힌 용의자의 흔적은 ‘하나의 점’에 불과했다. ‘사건이 미궁에 빠지면 어쩌지’ 걱정도 됐다. 그날도 팀원들에게 ‘원점 재수사’를 지시하고 3월 6일치 CCTV 동영상을 다시 돌려보고 있었다.

 “잠깐, 거기 멈춰봐. 저 발목, 용의자 아냐? 중간에 어디 들른 거 같은데?”

 “동선을 보니 용의자가 맞네요.”

 “KT 전화국 앞길이네요, 2분35초 만에 다시 돌아오는데요”

 “거기 뭐 있는지 확인해봐. 당장!”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CCTV에 등장한 발목의 주인을 찾기로 했다. 수사팀을 보내 CCTV 부근에 은행 현금인출기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3월 6일 그 시간대에 돈을 빼낸 이를 추적했다. 그 결과 중국동포 김모(50)씨의 인적사항이 확인됐다. 이후 김씨 주거지 주변 CCTV를 확보해 김씨의 걸음걸이·보폭과 범행장소 인근에서 찍힌 용의자의 걸음걸이 등을 비교 분석했다. 그 과정만 두 달이 걸렸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에서 분석 결과를 보내왔다. “동일인물임을 배제할 수 없다.”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김씨의 통화내역과 금융거래 내역 등을 조사했다. 세계 킥복싱·무에타이 연맹의 이사를 맡고 있는 58세의 이모씨 이름이 튀어나왔다. 2011년 입국한 김씨 역시 연변공수도협회 회장을 지낸 유단자였다. 김씨와 이씨, 두 사람은 8년 전 중국에서 만나 맺어진 ‘의형제’ 사이였다.

 이씨 주변을 탐문한 결과 그와 가까운 S건설 사장 이모(54)씨가 살해된 경씨와 소송을 벌이고 있었다는 사실이 파악됐다. S건설 이씨는 경씨와 수원지역 아파트 신축공사를 위한 토지 매입을 놓고 2009년부터 수억대 규모의 법적 분쟁을 벌였다. 퍼즐이 맞춰졌다.

 지난 6일 새벽 5시. 경기도 안산에서 김씨를 체포했다. 김씨는 처음엔 형사들을 밀치고 도주하려 했지만 형사 10여 명이 둘러싸자 체념한 듯 순순히 잡혔다. 그러나 바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방화동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고 잡아뗐다. 증거를 들이대며 설득했다. “왜 그랬느냐”고 어르기도 했다. 김씨가 자백을 시작한 건 이튿날 오후 9시쯤. “제가 했습니다. 언젠가는 잡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킥복싱·무에타이 연맹의 이씨로부터 착수금으로 두 번에 걸쳐 3100만원을 받은 사실도 털어놓았다. 그는 이씨가 “경씨를 제거해달라”고 했고, 이씨에게 성공했다는 의미로 낚시할 때 찍은 사진도 보냈다고 말했다.

 이튿날인 8일 경기도 수원에 있는 이씨를 그의 사무실에서 체포했다. 김씨는 이씨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A4 용지 3장 분량의 편지를 썼다. ‘팀장님이 인간적으로 대해주셔서 거짓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CCTV에 다 나옵니다. 형도 사실대로 얘기하세요.’ 체포된 이씨는 범행을 일부 시인했다. “죽이라고 한 적은 없다. 혼내주라고만 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러면서 S건설 이씨와는 30년간 수원 지역에서 알고 지낸 사이라고 했다.

 경찰은 경씨와 소송을 벌이던 S건설 이씨가 당초 K사의 소송 담당 직원 홍모씨를 살해하려 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킥복싱·무에타이 연맹 이씨는 S건설 이씨가 자신에게 “4000만원을 줄 테니 홍씨를 혼내줄 사람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고 진술했다. 부탁을 받은 이씨는 홍씨의 사진과 차량번호 등을 김씨에게 전달했고, 김씨는 홍씨 주변을 배회하며 살해 기회를 노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씨가 K사에서 퇴사해 행방이 묘연해지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고 경찰은 말했다. 이에 따라 S건설 이씨는 범행 대상을 경씨로 바꿨고, 김씨는 결국 경씨를 살해했다는 게 경찰의 수사 결과다. 하지만 체포된 S건설 이씨는 “범행을 지시한 사실이 없다”며 살인교사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 류 팀장은 “15일 기소의견으로 이들을 검찰에 송치했다”고 말했다.

채승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