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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문화가 만나는 곳「발리」섬|박재규<정박·경남대학 극동문제 연구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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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현대문명이 어느 날 인간을 파괴하지나 않을까 하는 의문에 부딪치는 때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라는 발리에도 문명은 이미 착륙하고 있지만, 아직 훼손되지 않은 자연과 발리 특유의 문화가 인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12월 한국의 겨울을 떠나 언제나 여름인 발리 덴파사 공항에 내린 것은 한밤중이었다. 인도네시아 국제전략연구소와 경남대학 극동문제연구소가 공동 주최하는 제3차 한-인니 학술회의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찬란한 의상의 무희들이 손가락과 육체를 율동적으로 움직이는 발리 춤으로 대표단을 맞이하는 황홀한 환영 식이 있었다. 남양의 향기로운 꽃송이로 가슴을 장식한 일행은 버스에 올랐다.
암흑의 창 밖은 때로는 벌판이고, 때로는 정글이라는 추측 뿐, 이따금 오두막 불빛 외엔 미지의 땅일 뿐이었다. 이튿날 새벽, 오묘한 새소리와 창 틈으로 새어든 햇빛에 휘장을 젖혔을 때, 눈앞에 펼쳐진 정경은 돌 연의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야자나무 사이사이로 보이는 바다, 숲 속에 피어 있는 남양의 찬란한 꽃들, 아마도 현대인들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천국 도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회의전날은 발리의 자연과 문화의 답사로 보냈다. 제주도의 배가 된다는 면적의 대지에 인구는 2백만 명 정도, 대초원에 드문드문 펼쳐진 인가가 한가롭고「태초의 자연」을 연상케 하는 풍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결혼을 하려면『처녀를 납치하여 숲 속으로 도주해서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는 풍습도 아마 그 자연에 걸맞음이리라.
집집마다 사당을 모시고 곳곳에 성전이었어 힌두교는 생활화돼 있었다.
『화내지 말고, 싸우지 말아야 한다』는 규범이 있어 길거리에서 싸움하는 광경을 찾아볼 수 없으며, 또 범죄가 적다는 것이 특징이다. 탐팍시링 성전에는 지하에서 언제나 맑은 물이 솟고 있어 성수로 쓰인다. 힌두의 신과 우상숭배의 사상에서 비롯된 건축·조각예술도 거의 생활화되어 발리 인이면 누구나「예술가」라고 자랑한다. 대개의 국어를 한둘 이상 말할 수 있으며 그림·목각·염색(바틱)등 이 농업이외의 생활수단이 되었다.
방마다 발리문화가 여흥으로 소개되었다. 전설적이고 신화적인 탈춤 극『바룽과 크리스 댄스』는 선과 악의 영원한 투쟁이라는 거대한 테마를 오히려 흥미롭고 다채롭게 엮었다. 심청이 처 럼 희생된 제물의 귀공자가「바붕」이 되어 악귀와 싸우나 그 전투는 영원히 계속된다는 가면극이다.
오키스트러는 장도리 모양의 악기로 목 금을 두드리는 양식인데, 악보 없이 자손에게 전해지는 전승음악이라 한다. 표면상의 고저음향 밑으로 깔린 단조의 멜로디는 우수적인 동양적 특색으로 한국이나 일본의 소리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다.
오키스트러 없이 원숭이들의 춤과 소리로만 안무하여 극화시킨 케착(용키) 댄스는 라마야나의 무용전설에서 발췌한 것으로 권선징악을 테마로 하고 있다. 프로그 댄스에서는 5, 6세의 소년들이 개구리의상을 입고 등장한다. 동식물과 인간이 구분 없이 얽히는 로맨스 극의 세계가 바로 발리의 원시세계가 아니었는가 싶다.
어린이들이 개구리 탈을 벗고 인사할 때, 그 애틋한 정감을 어떻게 표현했으면 좋을까. 여흥가운데서 문화의 깊이로 돌입되는 느낌은 물론, 관광 업의 발달로 모든 소재를 체계화했다는 점에 있겠다.
오늘의 인류가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는 가운데서도, 크게는 서양과 동양. 그 안에서도 수많은 갈래의 문화지역은 서로를 모르면서 살고 있다.
동남아지역과 동북아지역이 서로 이질적이면서도 공통되는 점, 감정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서양보다 훨씬 가깝다는 점은 서로를 알수록 스스로 우러나오는 애정의 흐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동남아와 극동의 결속의 시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한-인니 학술회의에서 인도네시아 대표가 마지막으로 탄 말과 같이 서로의 접촉은 설사 이익을 좀 잃는다 해도 우정을 잃지 말자는 철학 위에 세워져야 할 것이다. 발리는 자연과 문화와 문명이 지금까지는 평화롭게 만나고 있는 곳이었다. 세계의 한 구석인 아름다운 발리는 잠시나마 미래의 세계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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