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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8) 최고의 중식 요리사가 된 화교 형제 여경래·경옥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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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자루의 칼(三把刀·싼바다오). 화교가 생업으로 삼아온 일을 일컫는 말로, 비단 끊는 가위와 한약방의 약재용 칼, 중화요리의 식도를 뜻한다. 그중 중화요리는 한국에 정착한 화교들이 가장 많이 몸 담은 분야다. 중·고등학교를 마치면 으레 중국집에 취직했다. 모두가 뛰어든 만큼 훌륭한 요리사가 되기 위한 경쟁은 치열했다. 누구나 하지만 실력을 인정받는 건 소수였다.

여경래(54·그랜드앰배서더 중식당 홍보각 대표, 이하 여 대표)와 경옥(51·롯데호텔서울 중식부문 이사, 이하 여 이사) 형제는 둘 다 최고에 올라선 드문 경우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중국 국적 때문에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이 형제의 녹록치 않은, 그러나 결국 성취한 영광스런 삶을 되돌아봤다.

① 중화요리 식도는 화교의 생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형 여경래 대표가 10년 넘게 사용한 중화요리 식도(위)와 동생 여경옥 이사가 10년 넘게 사용 중인 식도.

② 2008년 형제가 함께 등장한 홍콩이금기사(社)의 광고.

③ 2008년 중국요리 마스타셰프(세계중국요리명인연합회 인정 셰프를 뜻함) 100인 전집에 소개된 여경래 대표와 그의 요리.

④ 형제는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우애 좋기로 소문났다. 10살 무렵의 형(오른쪽)과 7살 동생. [사진 여경래]

⑤2014년 형제는 이렇게 나이 들었다. 형(오른쪽)과 동생. 형제는 여전히 우애가 좋다.

⑥ 10년 전 어머니(맨 앞줄 가운데) 팔순 당시 촬영한 가족 사진. [사진 여경래]   

화교 뿌리, 그리고 지긋지긋한 가난

산둥성 출신의 아버지(1921~1965)는 1940년대 보따리 장사하러 평양에 처음 왔다. 기근이 심해 먹고 살 길을 찾아 한국에 온 거다. 사실 20년대에서 40년대말까지는 화교의 전성기였다.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소소한 무역업을 하기도 하고, 잡화점·비단가게·양장점·이발소·식당 등을 운영하며 돈을 꽤 벌었다. 그러나 형제의 아버지가 한국에 온 지 몇 년 안 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48년)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이듬해 중국 본토에 공산당 정권인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이 들어서며 펼친 이주억제정책 탓에 발이 묶여 다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국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형제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국인 아내 김영래(91)씨를 만나 수원에 정착해 농사를 지었다. 큰아들(경래·60년생)과 작은아들 (경옥·63년생)이 차례로 세상에 나와 단란한 가족을 이뤘다. 그러나 행복은 짧았다. 65년 큰아들이 보는 앞에서 차에 치어 세상을 떠났다. 여 이사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가 불과 세 살이라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며 “얼굴도 사진 속 모습으로만 기억한다”고 말했다.

형제에게 어린 시절 기억은 오로지 가난뿐이다. 당시 한국 정부의 배화(排華·화교 배척) 정책 탓에 화교사회가 위축됐다지만 형제에겐 이런 소리하는 다른 화교들이 배부른 소리하는 걸로 생각됐다. 그만큼 먹고 사는 게 힘들었다. 쌀밥은 어쩌다 한번씩 맛볼 수 있었다. 늘 나라에서 영세민에게 배급주는 밀가루로 만든 음식뿐이었다. 여 이사는 어쩌다 한번씩 쌀 심부름 갈 때면 쌀밥 먹는다는 생각에 기쁘다기보다 오히려 창피했다고 한다. 남들은 ‘말’로 사가는 쌀을 ‘되’로 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매년 이사했어요. 집세를 못 내니 계속 더 안 좋은 집으로 옮긴 거죠. 비 오면 위에선 물 새고, 바닥은 물에 잠기고. 지금도 비랑 밀가루가 제일 싫어요. 그나마 이제 좀 살만해져서인지 비 오면 커피 한 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고요.”

어머니는 한국인이었지만 형제는 수원에 있는 화교 초등교육기관인 수원화교중정소학교에 들어갔다. 아버지 뿌리를 잃지 않게 하려는 어머니의 바람 때문이었다.

“아버지 피를 따라 화교학교에 가야 한다는 이유였어요. 또 애비 없는 자식 소리 안 듣게 하려고 어머니는 우리 형제를 더 엄하게 키웠어요. 늘 동네에서 제일 인사 잘하는 아이였어요.”

하지만 화교학교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일단 형제 모두 중국어가 서툴었다. 또 화교학교에서 늘 “중국사람”이라는 걸 강조했는데, 이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하교 때 차례대로 줄서서 교문을 나갔는데 한 명씩 나갈 때마다 기다리고 있던 한국 아이들과 싸움을 했다.

“우리 학교 애들이 한국 애들하고 많이 싸웠어요. 하도 싸우니 학교에서는 여럿이 안 내보내고 줄서서 나가라고 한 거죠. 그래도 싸움은 계속됐지만요. 사실 싸울 일도 아닌 데 말이에요. 한국 애들이 ‘짱깨’라고 부르면 싸우는 거죠. 화교는 짱깨란 말 정말 싫어해요. 말하는 사람은 별 생각없이 하는지 몰라도 화교를 비하하는 말이니까요.”

“중학교 졸업했으니 중화요리를 배워라”

수원에 화교 중학교가 없어 형제는 둘 다 서울 연희동의 화교 중학교에 들어갔다. 매일 가는 데만 두 시간 넘게 걸렸다. 그리고 졸업하자마자 바로 중식당에 취직했다. 여 대표는 16살이던 75년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며칠을 울었어요. 다른 친구처럼 고등학교에 갈 줄 알았는데 못간다는 거예요. 어머니가 ‘너희는 중국인이니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거예요. 그 기술이 뭘 말하는 지도 몰랐죠. 며칠 후 왕서방이라는 분이 오셔서 서울로 데려갔어요. 종로2가 회현반점이라는 중국집이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중학교 동창네 집이더라고요. 짜장면은 그때 처음 봤어요.”

네 살 무렵 아버지(1965년 작고)와 함께 한 여경래 대표. [사진 여경래]

한 반 70여 명 중 그렇게 중화요리 길로 들어선 게 다섯 명이다. 1년 동안은 월급 6000원 받고 홀에서 일했다. 당시 자장면 한 그릇을 150원 받던 시절이다. 주방에서 일한 건 이듬해 노량진의 한 중식당에 취직하면서부터다. 하루 종일 수타를 했다. 남들은 한참 걸려 배운다는 수타를 이틀 만에 해냈다. 90년대 여 대표를 스타셰프로 만들어 준 수타 실력은 이때 배운 거다. 이후 78년 한남동 거목에서 일했다. 여 이사도 중학교 졸업 후 영등포 쪽에 있던 소복장이라는 중식당에 취직했다. 배달부터 했다.

“세상 경험이 전혀 없었잖아요. 정말 어리바리했어요. 배달 갔는데 손님이 얼마냐고 묻더라고요.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식당으로 다시 뛰어왔죠. 주인이랑 손님 둘 다 얼마나 혼내던지. 그렇게 한 6개월 정말 많이 혼났어요. 그래서 처음 온 직원이 좀 어리바리해도 혼 안내요. 옛날 생각 나서요.”

고수를 만나다

79년 여 이사는 형이 일하던 거목에 취직했다. 거목은 형제가 대표적인 중국요리사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당시 어느 집이든 중국 요리사는 자기 요리법을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다. 그것만이 본인의 재산이자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선배가 요리할 때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선배 왕진휘(미국 거주)씨가 자신이 아끼던 요리노트를 여 대표에게 건넸다.

“마치 무협지에서 고수가 비급(<7955><7B08>·소중히 보존되는 책)을 건네듯 선배가 공책 세 권을 주더라고요. 요리 비법이 적혀있었죠. 요즘 같으면 복사하거나 사진 찍으면 되는데 그땐 그런 게 없잖아요. 일 끝나면 밤새 베꼈어요. 식당에서 숙식하던 시절인데 일 마치고 매일 새벽 3~4시까지 적느라 쌍코피 여러 번 흘렸죠. 나중에 생각해보니 직접 손으로 쓰니 더 공부가 된 것 같아요.”

여 대표는 심지어 선배들이 만든 요리를 기억해뒀다 그림으로 남겼다. 그러곤 혼자 그림 보고 따라했다.

이후 요리사 인생 최고의 스승으로 꼽는 최고의 주방장 고(故) 오학지와 왕춘례를 만난 방배동 함지박으로 옮겼다.

“얼굴에 수두 자국이 많아 곰보 주방장으로 유명했던 오학지 사부가 있었죠. 손이 정말 빨라 내가 음식 두 개 만들 시간에 일곱 개 코스요리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사장이랑 안 맞아서 나갔고 그 다음에 온 사람이 왕춘례 사부였어요. 당대 최고의 칼판(주방 칼질 담당)이었어요. 운이 좋았죠. 당대 최고의 주방장을 연달아 사부로 모셨으니.”

형이 당대 최고 스승 아래서 배우는 사이, 동생은 홍보석으로 갔다. 동부이촌동에서 서울역 앞 대우빌딩으로 옮긴 홍보석은 중식 부흥기인 60~80년대 아서원·호화대반점(사보이호텔)·팔선(신라호텔)과 함께 서울 4대 중식당으로 꼽히던 곳이다. 남진과 고 앙드레김 등 유명인들의 아지트로 유명했다. 여 이사는 이곳에서 면 삶기와 칼질을 배웠다.

“항상 먼저 출근했어요. 기술직은 부지런한 게 정말 중요해요. 그전엔 제일 먼저 오던 사람이 칼판장(칼질 담당 중 선임)이었는데 제가 항상 더 먼저 나갔죠. 그 칼판장이 면 삶던 저를 칼판으로 데려갔죠.”

이후 2~3년 새 불광동·방배동 등 여러 중식당을 두루 거쳤다. 신사동 늘봄공원(현 늘봄예식장) 맞은편에 있던 만다린에서 20살 무렵부터 부주방장을 맡았다.

“당시 중식당 전성기라 여러 곳이 문을 여는 바람에 실력있는 요리사 스카우트 경쟁이 벌어졌어요. 요리사들이 1년쯤 일하다 옮기면서 몸값을 계속 높이는 분위기였어요.”

여 이사 월급도 4년 새 크게 올랐다. 78년 2만5000원에서 82년 40만원으로 껑충 뛰었다. 형제는 결혼 전까지 월급을 고스란히 어머니한테 드렸다.

지난달 여경옥 이사가 수상한 동탄산업훈장.

호텔 중식당 시대를 주름잡다

74년 퍼시픽호텔 야상해를 시작으로 75년 사보이호텔, 77년 프라자호텔, 79년 신라·롯데호텔이 중식당을 내며 호텔 중식당 시대가 열렸다. 여 대표는 83년 팔래스호텔 중식당, 여 이사는 이듬해 84년 신라호텔에 입사했다.

“형이 대우 좋고 배울 게 많다고 추천했어요. 밖의 중식당과는 요리 스타일도 다르다고요. 신라호텔 입사 당시 경쟁률이 아마 몇백대 1이었을 거예요. 필기·실기·면접 등 5단계 넘는 시험을 봤어요. 그렇게 힘들게 들어갔는데 처음엔 말 그대로 ‘멘붕’에 빠졌죠. 지금까지 양으로 승부했는데 호텔은 질로 승부하더라고요. 게다가 부주방장까지 했는데 호텔에선 칼판 맨 끝에서 일했어요. 나이가 가장 어렸거든요.”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성장을 거듭하던 두 사람은 99년 대만국제요리대회에서 손을 잡았다. 장려상, 그리고 이듬해 대회에선 동메달을 땄다. 한국 최초로 국제 규모 중국요리대회에 따낸 상이었다. 그 다음 해는 중국 동방미식대회 개인전에서 라이벌로 붙기도 했다. 동생이 금상, 형이 은상을 수상했다.

국제요리대회 입상 등으로 유명세를 얻었지만 형제는 진로를 놓고 고민했다. 결국 동생은 2007년 24년간 몸담았던 신라호텔을 떠났다. “남자라면 자기 사업을 해야한다”는 형 조언을 따른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졌잖아요. 회사에서 인정받던 선배조차 하루 아침에 잘리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퇴사했죠. 사표를 안 받아줘서 3개월 동안 회사 연락을 안 받았어요. 힘들게 퇴사했지만 한편으론 고맙죠.”

형은 2003년 남산 타워호텔(2010년 반얀트리 클럽앤스파로 변경) 중식당 만복림을 인수했다. 96년 만복림 주방장으로 타워호텔에 입사했던 그가 이 호텔 중식당을 인수한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코리아나·그랜드힐튼 등이 식음업장을 직업 운영하는 대신 아웃소싱을 했는데 이후 다른 호텔도 따라한 거다.

“유럽·미국에서는 일반적이에요. 호텔 입장에서 보면 식음업장 인건비가 높아 마진이 별로 안 나거든요. 한 달에 한두 번씩 호텔 회장님과 독대하며 트렌드 얘기를 나눴는데 2003년 어느 날 회장님이 전화로 ‘여 주방장, 자네가 할 수 있겠나’라고 묻더라고요. 소름이 끼쳤죠.”

이후 2006년 반얀트리 클럽앤스파로 리모델링에 들어가기 전까지 10년 넘게 호텔을 지켰다. 그리고 2007년부터 그랜드앰배서더서울호텔(당시 소피텔앰배서더) 중식당 홍보각을 운영하고 있다.

여 이사는 2007년부터 형과 함께 중식당 루이·수엔190를 운영하는 동시에 지난해 롯데호텔 중식 부문 이사로 호텔업계에 돌아왔다. 신라호텔 재직 당시 친분이 있던 김정환 롯데호텔서울 총지배인 요청을 받아들인 거다. 여 이사는 “요리사가 대기업 임원이 된다는 데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화교, 그러나 한국인

“화교가 힘들었던 게 1962년 화폐개혁 때인데 워낙 어려 기억에도 없어요. 그저 휴대전화 개통할 때 외국인이라 좀 불편한 정도죠. 우리 둘 다 성격이 긍정적이에요. 화교여서 힘들다고 생각하면 모든 게 힘들어요.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솔직히 해외에서 그 나라 국민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겠다는 게 오히려 모순이 아닌가 싶어요.”

게다가 98년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를 660㎡(200평)로 제한한 조항을 삭제하면서 화교로 사는 불편함은 사라졌다. 다만 대만과의 단교 탓에 불편하기는 하다. 한국 거주 화교는 대만여권을 깡통여권이라고 부른다. 이들을 위한 비자업무 창구가 한국에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대만과 무비자 협정을 맺고 있지 않은 캐나다 출장을 가기 위해선 필리핀 등 제3국에 가서 캐나다 비자를 받은 뒤 출국해야 한다. 결국 여 이사는 2006년 귀화했다.

“전엔 국적 바꾸면 나라 팔아먹었다고 욕했어요. 하지만 저는 오히려 다른 화교들에게 ‘너희도 바꾸라’고 당당하게 얘기해요. 한국에서 태어나 오래 살았고 앞으로도 살 거잖아요. 내 아이도 그렇고요. 이방인이 아니라 한국인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글=송정 기자 asitwere@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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