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그때그때 다른 담합잣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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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위를 따르자니 소관부처가 겁나고, 소관부처를 따르자니 공정위가 두렵다."

지난달 25일 KT가 '정보통신부의 행정지도에 따라 담합했다'고 주장했음에도 무려 1159억원에 달하는 과징금을 맞자 다른 통신업체 임원은 이렇게 푸념했다. 행정지도를 많이 받는 주류.보험업계도 곤혹스러워하긴 마찬가지다. 이들은 "행정지도를 따르지 않으면 상당한 불이익을 받는 게 현실"이라면서 "어쩔 수 없이 따랐는데도 담합이라고 처벌한다면 대체 어떻게 하란 얘긴가"라고 하소연한다.

공정위 결정도 사안마다 다르다. 행정지도에 따라 똑같이 담합했는데도 어떤 경우엔 과징금을 매기고, 다른 담합은 무죄다. 이 때문에 업계는 "공정위가 따라도 되는 것과 따라선 안 될 행정지도를 구분해 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공정위 입장은 분명하다. 허선 경쟁국장은 "밖에선 똑같은 행정지도로 보이겠지만 속 내용은 다 다르다"면서 "담합은 심각한 범죄행위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지적했다. 담합을 요구하는 행정지도는 무조건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정위의 과거 결정 사례를 통해 어떤 행정지도는 따라야 하고, 어떤 지도는 거부해야 하는지를 살펴봤다.

◆ 무죄가 되는 행정지도=행정지도에 따라 담합했다고 해서 모두 처벌받는 것은 아니다. 법령에 근거한 행정지도에 따른 것이라면 무죄라는 게 공정위 설명이다. "다른 법령에 따른 정당한 행위에 대해선 공정거래법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공정거래법 규정(58조) 때문이다.

지난해 진로 등 위스키업체들은 주류 판매상들에게 경품 등 리베이트를 주지 않기로 담합했지만 공정위는 처벌하지 않았다. 경쟁 과열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리베이트를 주지 말라'고 지시한 국세청의 행정지도가 정당하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당시 국세청은 "국세청장은 주세 보전상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엔 가격 등에 관해 필요한 명령을 할 수 있다"(40조)는 주세법에 따라 지도했다고 설명했다. 외항 화물 운송업체와 엔지니어링 관련 기업들이 운임 등을 공동으로 정해도 처벌받지 않는 것도 해운법 등 관련 법령에 명기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의 행정지도가 법에 명기돼 있지 않거나 모호하면 처벌받는다. 문제는 모호한 행정지도가 대부분이라는데 업계의 고민이 있다. 그렇다고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01년 11개 손해보험사는 자동차 보험료를 똑같이 올렸다. 공정위는 합의 문서 등 명백한 증거는 없지만, 여러 정황상 담합임에 분명하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보험사들은 똑같이 올린 것은 금융감독원의 행정지도에 따랐기 때문이지 담합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금감원도 보험업계의 편을 들어 행정지도를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공정위는 법령에 근거한 행정지도가 아니라며 과징금을 부과했지만 이후 재판에서 졌다. 공정위 관계자는 "KT 경우와 달리 명백한 담합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라면서 "이 때문에 재판부는 보험사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 어떻게 해야 하나=이 같은 혼란을 해소할 책임은 결국 정부에 있다. 가령 기업들은 행정지도를 한 정부 부처가 공정위에 적극 해명해주기를 요청한다. 법무법인의 한 전문가는 "국세청과 금감원처럼 정부 부처가 법령에 따라 업계에 행정지도를 했다고 주장한다면 무죄로 판정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KT 사건의 경우 "행정지도가 지속적으로 있었다"는 KT 주장과 달리 정보통신부는 "초기에 잠깐 지도했을 뿐"이란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각 정부 부처가 자신들의 행정적 편의를 위해 법에도 없는 행정지도를 하는 관행이 사라져야 한다. 허 국장은 "행정지도는 과잉행정의 표본"이라면서 "각종 법령과 고시에 있는 경쟁 제한적인 요소도 조속히 없애야 한다"고 밝혔다.

김영욱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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