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 훔친 죄로 …" 죄수복 차림 연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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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는 없어도 되지만 콘트라베이스는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을 음악을 아는 분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겁니다. 콘트라베이스는 훌륭한 건축물을 떠받드는 주춧돌과도 같습니다. 콘트라베이스는 멀리 떨어져 연주할수록 더 잘 들리는 특이한 악기입니다. 자동차에 실을 때는 앞자리 오른쪽 의자를 떼어내어야 하지요.' 1984년 발표한 파트릭 쥐스킨트의 모노 드라마 '콘트라베이스'에서 콘트라베이스 주자인 주인공이 하는 말이다. 소설가 쥐스킨트는 높이 2m에 가까운 '거구'를 이끌고 오케스트라의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 악기에서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도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평범한 소시민의 일상과 생존과정을 발견한다.

쥐스킨트는 콘트라베이스 주자가 오케스트라 단원 생활을 그만 두면 길바닥에 나앉게 되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고 말한다. 콘트라베이스는 오케스트라 음색의 깊이와 폭을 더하기 위해서 없어서는 곤란한데도 청중의 관심 밖에 있는 '비인기 악기'이다.

오케스트라의 뒷구석에서 신세 한탄만 하던 이탈리아 출신 콘트라베이스 주자 4명이 4중주단 '베이스 갱'을 창단한 것은 2002년 12월. 기존의 유명 클래식이나 재즈, 팝송을 자유자재로 편곡한 작품으로 무대 전면에 나섰다.

아메리고 베르나르디(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 수석 주자 역임), 안드레아 피기(로마 산타 체칠리아 단원), 안토니오 스키안 칼레포레(로마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 수석 주자), 알베르토 보치니(피렌체 마지아 무지칼레 오케스트라 수석 주자) 등이 그 주인공이다. (사진 왼쪽부터)

콘트라베이스의 4중주는 현악4중주나 피아노 3중주처럼 역사가 오래되진 않았다. 하지만 20세기 들어서 베른하르트 알트 '모음곡', 막스 다우타게 '안단테', 빌헬름 피체하겐 '안단테', 요제프 라우베 '베이스 4중주' 등 많은 작품이 발표되면서 실내악의 한 장르로 자리를 굳혔다.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로 구성된 '베를린필 더블 베이스 4중주단'도 있다.

더블 베이스라고도 불리는 콘트라베이스는 4옥타브가 넘는 넓은 음역을 자랑한다. 줄 위에 손가락을 살짝 얹고 활을 긋는 플라지올렛 기법으로 내는 하모닉스까지 보태면 고음도 충분히 가능하다. 성악의 가성(假聲)과 같은 기법이다.

현을 손으로 뜯는 피치카토, 활의 탄력을 이용해 줄 위를 퉁기는 스피카토, 현의 진동을 몸체에 전달하는 브리지 부근의 줄을 마찰하는 술폰티첼로 등 다양한 주법으로 4명이 선율과 화음, 리듬의 역할 분담을 해낸다. 손바닥으로 몸통을 두들기면 타악기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다. 사실 콘트라베이스 만큼 따뜻하고 표정이 풍부한 음색을 내는 악기도 없다.

'베이스 갱'은 차이코프스키와 산타나, 프로코피예프와 스팅을 한 곡에 녹여낸 이색적인 편곡으로 관객의 웃음을 자아낸다. 코믹한 더블 베이스로 사람들의 배꼽을 훔치면서 강도짓을 하다가 잡혔다는 의미로 이번 무대에서도 죄수복을 입는다.

◆ 공연 메모=17일 오후 8시 서울 코엑스 오디토리움, 18일 서울 나루아트센터. 차이코프스키-산타나 '세레삼바', 데오도라키스 '희랍인 조르바', 피아졸라'더블 베이스 전주곡', 거슈윈 '서머 타임', 베르디'리골레토 4중창', 베토벤'운명 교향곡 스윙' 등. 02-599-5743.

글=이장직 기자 <lully@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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