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6)혈맥인맥|첫 신문 새해 휘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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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협전과 선전에 94번 입선하고 후소회도 만들어 단체활동을 하면서 우리들은 제법 화가대접을 받았다.
내가 화가로서 이름을 얻으니까 나보다 한살위인 삼촌(장린영)이『뒤좀봐달라』면서 제일 먼저 달려왔다.
삼촌은 약종상허가를 내려고하는데 경기도 위생담당 전촌경부가 내 그림을 좋아하니 그를 한번 만나서 부탁해달라고 떼를 썼다.
삼촌과는 어려서부터 같이 자랐고 서당공부도 함께해서 항렬만 위였지 친구와 같았다.
삼촌에게『그런일을 어떻게 하느냐』고 난색을 표했더니『사람을 대서라도 일을 봐줘야지, 내가 누구에게 이런 부탁을 하겠느냐』고 통사정했다.
나는 수가 워낙 좁아 교제하고는 담쌓고 지내는 터여서 난감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렇다고 아버지형제인 삼촌의 간곡한 부탁을 외면할수도 없어서 생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이러던차에 구세주를 만났다. 김상설이란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그가 발도 넓고 영향력도 있어 약종상허가를 청탁했다.
그는 곧장 전촌경부를 화신뒤 태서관으로 불러냈다.
김상설씨는 일을 만들어놓고 삼촌과 나를 태서관으로 오라고 했다. 우리는 부랴부랴 요리값을 챙겨가지고 태서관으로 갔다.
이자리서 김씨가 나를 전촌경부에게 소개하고 약종상청원자의 조카라고 덧붙었다. 전촌은 약종상에 관한 이야기는 통 안하고 조선미술과 화가둘에 대해서만 이것저것을 물었다.
그는 서화골동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우리화가들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다.
전촌은 나에게 깊은 관심을 표시하면서 화실에 놀러오겠다고 말했다.
그림이야기만 하니까 삼촌은 약종상 걱정때문에 좌불안석이었다. 술도 잘못하는 분인지라 억지로 앉아 있느라 단단히 기합을 받은 셈이다.
김상설씨도 약종상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제가 부탁하는 딴 이야기만 하고있었다. 자리를 일어서면서 내가 얼른 입이 떨어지지 않는데도 『잘부탁합니다』고 인사, 약종상허가를 넌지시 환기시켰다.
우리는 술값을 치르고나서 남의 일만 해준것 같아 뒷맛이 개운치 않았는데 얼마후에 약종상허가가 나와 삼촌은 서울 도동에서「영인당」이란 이름으로 개업했다. 이때 중·일전쟁이 일어났으니까 아마 37년의 일인것 같다.
이런일이 있은 1년후엔가 나는 난생처음 그림주문을 받았다.
그것도 대신문사의 신년휘호였다.
겨울이었는데 하루는 심산(우노현)이 인력거를 타고 명륜동집까지 찾아왔다. 심산은 망토같이 생긴 외투(임바네스)를 입고 서서 나를 찾았다. 나는 심산과 인사만하고 지낼뿐 그렇게 가까운 터는 아니었다.
심산은 내게『신문사에서 쓰려고하니 신년휘호 한장 해줄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나같은 신출나기 화가에게 큰신문사가 신년휘호를 부탁하는게 고맙기 이를데 없는일일 뿐아니라 심산어른이 직접 내집에까지 찾아와서 그림주문을 해줘서 기쁘기 한량없었다.
나는 무얼 그릴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한마디로 승낙했다. 그랬더니 심산이 외투 소매속에서 납짝한 상자를 꺼내주며 『얼마 되지 않지만 신문사에서 주는것이니 받아두라』고 했다.
심산이 돌아간뒤 얼른 뛰어들어와 상자를 열어보았더니 그속에는 화신상회에서 발행한 5원짜리 상품권이 들어있었다.
그림을 받아가기전에 화료부터 받은격이어서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이만한 대접을 받을수 있구나하고 내심 기쁘기까지 했다.
나는 신문사에서 받은 5원짜리 상품권을 가지고 화신상회에 가서 이것저것 꽤 많은 물건을 샀다.
그때 돈5원은 그렇게적은 돈이 아니었다. 액수로는 요새돈 10만원 정도지만 화폐가치는 지금보다 몇배 짭짤했다.
이때부터 심산하고는 가끔 만날수 있었다. 심산은 원서동에서 어렵살이 살았다. 보잘 것 없는 조그마한 집이었는데 내가 아버님회갑기념 화첩을 받으러 갔을때도 집이 초라하다고 들어오라고도 않고 화첩만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얼마후에 화첩에다『자목련』을 정성것 그려 보내줘 그때의 고마움을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다.
심산과 나는 서울대 미술대학에서도 여러햇동안 같이 일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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