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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서 죽나, 서서 죽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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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고현곤
편집국장 대리

1997년 11월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우국지사(憂國之士)가 속출했다. ‘일찌감치 위기를 경고했는데, 내 얘기를 귀담아 듣지 않아 이 지경이 됐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이를 언론에 흘리기도 했다. 한국은행은 그해 3월에 이미 외환위기를 경고한 보고서를 냈다며 자기방어에 나섰다. 다른 연구기관이나 전문가들도 ‘나는 경고했다’에 명함을 내밀었다.

 심지어 외환위기 주무부처인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금융위원회) 내에서 ‘나는 경고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책임을 면하려고 그런 건지, 영웅이 되려고 그런 건지는 모르겠으나 많은 이가 비슷하게 처신했다. 그런 재주가 없는 사람들은 외환위기 주범으로 몰렸다.

 학습효과는 대단했다. 2000년대 닷컴 버블, 카드대란, 부동산 과열, 금융위기 등 경제가 삐끗할 때마다 ‘나는 경고했다’가 잇따랐다. 혜안을 갖고 위기를 예측하거나 정책을 비판한 이들이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게 뒤죽박죽 섞이면서 상황 판단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위기를 경고하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파국을 막는 단초를 제공한다. 게다가 예측이 틀려도 부담이 적다. 의도했든 안 했든 실제 위기가 오면 ‘나는 경고했다’ 대열에 낄 수 있다. 위기가 오지 않으면? 아무 일 없이 넘어가면 그만이다. 예측이 틀렸다고 찾아내 망신을 주는 일은 없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예견한 덕분에 단박에 세계적인 명사가 됐다. 여세를 몰아 그는 2013년 세계경제에 대공황에 가까운 ‘퍼펙트 스톰’이 온다고 경고했다. 퍼펙트 스톰은 오지 않았다. 세계경제가 여전히 불안하지만, 앞으로도 한동안 퍼펙트 스톰이 올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루비니는 금융위기를 미리 경고한 비범한 학자로 기억될 뿐이다.

 요새 가장 뜨거운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는 빈부 격차가 벌어질 것으로 예견했다. 지난 300년간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컸다는 데이터를 근거로 들었다. 두 수치를 너무 단순하게 비교했다는 비판이 있지만, 경제구조가 확 바뀌지 않는 한 그의 예측이 맞을 가능성이 크다. 예상과 달리 빈부 격차가 줄어들면? 모두 만족스러워할 테니 피케티를 나무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경제가 어렵자 최경환 경제팀은 금융과 재정을 아우르는 부양책을 마련했다. 많은 경고와 우려가 나왔다. 실제로 부양책이 반짝효과에 그치면서 가계 빚만 증가할 위험이 있다. 정부가 적자를 감수하고 씀씀이를 늘리다 경기는 살아나지 않고, 마지막 보루인 재정을 축낼 수도 있다.

 늘 그랬듯 한은은 신중하다. 위기 때마다 앞에서 돌파하기보다는 뒤쫓아간 한은이다. 이번에도 정부와 손발을 맞추는 듯하면서도 ‘나는 경고했다’에 한 발을 걸치고 있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재정 확대와 금리 인하로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정치권도 부양책에 우호적이지 않다. 야당이야 그렇다 치고, 여당에서도 다른 발언이 나온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재정 확대 등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국회에서 법이 통과해야 부양책이 제대로 작동하는 점을 감안할 때 예사롭지 않다.

 정부도 한은이나 여당에서 지적하는 부양책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 걱정되지만, 달리 대안이 없어 내색하지 않을 뿐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구조개혁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만큼 급한 대로 부양책에 매달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양책이 소비와 투자 증대로 이어지지 않으면 3~4개월 후 경기가 더 가라앉을 가능성이 있다. 그때는 정책 카드도 마땅치 않다. ‘그냥 놔뒀다가 앉아서 죽나, 뭐라도 하다가 서서 죽나’를 떠올릴 정도로 절박하다.

 현오석 전 부총리 때 좌고우면(左顧右眄)하는 바람에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최경환 부총리는 지나치다 싶게 과감히 밀어붙이고 있다. 지금은 진심 어린 비판이 필요하지만, ‘나는 경고했다’를 염두에 둔 지적은 도움이 안 된다. ‘그게 되겠어’ 식의 비아냥은 더더욱 곤란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최경환 경제팀을 밀어주는 게 현실적인 선택인 것 같다. 비록 최선책은 아닐지라도.

고현곤 편집국장 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