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달걀 한개·치즈한조각만 입에 넣어봤으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본-김동수특파원】다음은 폴란드에 비상사태가 선포되기직전 바르샤바근교 공장지대와 뒷골목의 암시장을 답사한 서독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통지「외르크·보레머」기자의 르포기사다.
바르샤바의 겨울은 질퍽한 진눈깨배로 더욱 음산해 보였다. 새벽 5시쯤「야체크·콜라프스키」(33)는 겉옷을 세겹씩이나 껴입고 집을 나섰다. 바르샤바교외의 기계공장에서 기술자로 일하는 그는 1주일에 한번은 이짓을 해야한다.
담배판매소 앞에 이르렀을 때 자기딴에는 꽤 일찍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긴 행렬이 늘어서 있었다. 꽁무니에 붙어 설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으면 한달에 1갑씩 배정된 자기몫의 담배중 4갑정도를 한꺼번에 타낼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담배가게가 문열기를 기다리며 이틀후 새벽 또한번 주류판매소앞에 줄설 생각을 하곤 입맛을 다셨다. 생활필수품이 배급제로된 이래 한달에 반병씩 해당되는 보트카를 마실수 있다는 새악때문만이 아니었다.
술·담배를 입에 대지 않는 그가 새벽잠을 설치며 줄을 서는 것은 이 두가지 기호품이 생활필수품을 구하는 물물교환에서 가장 가치있는 돈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야체크」는 이번달에는 술·담배를 가지고 치약, 가루비누, 약간의 코피와 바꿀 생각이다.
『폴란드 경제가 물물교환의 원시경제상태로 후퇴하는 것이 골치거리』라고 폴란드의 「마리안·크자크」경제상이 인정했을 만큼 화폐로 구할수 있는 물건이 드물다.
담배4갑을 얻어 출근하는 「야체크」의 발걸음은 다른 날에 비해 가벼운 편이었다. 출근시간은 7시30분.
이날 아침에는 30분정도 지각했으나 곧장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먼저나온 동료가 다른 사람의 출근서명을 대신 하는 것이 관례로 돼 있기 때문이다.
상오 11시쯤 그는 다시 직장에서 빠져나와 시내의 생필품 상점을 돌아다녔다. 동료중 어떤 사람은 며칠째 결근을 하며 겨울구두를 사러 돌아다니고 있다. 감기들어 집에 누워 있는것 보다는 차라리 며칠 직장을 빠지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서다.
뒷골목으로 들어가는 어귀서부터 암시장이 시작된다. 허름한 차림의 할머니가 담배 두갑을 들고 흥정을 벌이고 있다.
폴란드에서 가장 좋다는 클루보베담배는 한갑에 원래가격의 4배인70즐로티(1천5백원)이고 미제말보로나 서구담배는 3백50즐로티(7천7백원).
바로 옆에는 한 노인이 낡은구두 몇켤레를 늘어놓은채 웅크리고 앉아있다. 그런 구두를 누가 사갈까?
진눈깨비를 막느라 둘러친 포장아래서도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른버섯이며 마늘두름, 소시지 몇꼭지가 기둥에 걸려 있다. 봉지에 포장된 외국제 소시지 한 개에 1천5백즐로티(3만3천원).
따끈한 고기경단을 파는 아낙네도 있었다. 국남비에선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냄새도 구수하다.
계란이 수북이 쌓인 노점앞에 몇몇이 기웃거리고 있다. 계란 한 개값은 18즐로티(4백원). 이따금 궁영상점에 진열될때는 6즐로티씩 하는 것이다.
육류는 이 암시장에서도 구할수없다. 바르샤바교외에서는 농민들이 새끼돼지를 비교적 싼값에 내다판다고는 하지만 한 마리에 4천즐로티(8만8천원)가까이 한다.
털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초췌한 노인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오들오들 떠는 노인은 한 여자손임에게「최고 품질」의 비누 한조각을 내밀고 있었다. 털장갑 사이로 손가락 두개가 비죽이 내다보인다.
서둘러 공장으로 돌아가던「야체크」는 한 상점앞에 긴행렬이 늘어선 것을 보고 얼른 뒤꽁무니에 따라붙었다. 『무얼 팝니까』『레몬인가봐요.』
한시간 남짓 기다렸으나 그에게 까지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일에는 익숙해 있으므로 별로 짜증도 나지 않았다.
하오 4시「야체크」는 다시 작업장을 나섰다. 단골식품점에서 1주일에 한번씩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치즈를 파는 날이기 때문이다. 육류라곤 구경해본지도 오래됐으니 빵과치즈, 그리고 계란만 있으면 그날 저녁은 성찬이 되는 셈이다.
「야체크」가 치즈를 사들고 집에돌아온 시간은 하오5시. 이날은 3가지 물건을 샀으니 비교적 기분은 좋았지만 뛰어나오는 아들(5)과 딸(3)을 보고는 잠시 시무룩해졌다.
과자라도 사들고 나누어주고 싶은 생각은 늘 있지만 벌써 몇 달째 아이들을 빈손으로 안아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은 것은 한두번이 아니지요. 그래도우리는 오린지가 어떻게 생긴 것은 알고 초컬리트의 맛도 잊지 못해요. 그런데 아이들은 아직 그런걸 본일이 없으니 어떻게 설명해 주죠?』찾아간 기자에게 「야체크」의 부인이 말했다.
『이게 하루이틀입니까. 병자에게 위태로운 고비가 있더라도 하룻밤이면 살든 죽든 결판이 나게 마련인데…이런상태가 아직도 얼마나 계속돼야 하나요. 끝을 모르겠으니…』눈물을 글썽이며 부인이 말하는 것을 들으며 두 아이를 무릎에 앉힌채「야체크」는 잠자코 있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