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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질듯 말듯…개혁의 불 25년|공산당집권이래 유혈폭동으로 지새워온 폴란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13일의 비상사태선포로 16개월만에 제동이걸린 폴란드의 민주개혁운동은 2차대전후 이나라에 들어선 공산정권이 4번째로 맞은 정치·사회적 위기다.
첫 소요사태가 터진것은 1956년이었다. 이해 6월 식량부족이 심각해지자 중서부의 포즈나니시일대에선 수천명의 노동자들이 『우리에게 빵과 자유를 달라』며 공산당사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강경파가 잡고있던 정부는 군투입으로 응답했고, 뒤따른 폭동에서노동자들은 4백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넉달뒤인 10월 폴란드 당과 정부의 온건파는 유혈사태의 책임자인 강경「스탈린」주의자들의 제거작업에 나섰다. 당시 소련지도자였던「니키타·후르시초프」는 사태수습을 위해 황망히 바르샤바로 달려갔지만, 그의 앞에 내밀어진것은 『폴란드는 끝까지 싸우겠다』는 최후통첩이었다.
「후르시초프」는 소득없이 후퇴했고, 49년 소련의 미움을 사 숙청됐던「블라디스와프·고물카」가 폴란드의 새지도자로 들어섰다. 그후 14년동안 「고물카」는 큰 어려움없이 자리를 지켰지만 좀체 나아지지않는 경제상황으로 인기는 떨어져만 갔다.
70년12월, 당국의 급작스런 물가인상에 자극받은 북부 발트해연안지역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시작했다. 「고물카」는 군과 탱크를 동원했다. 45명의 노동자가 희생됐다.
무력으로 사태는 일단진압됐지만 후유증을 컸다. 유혈사태에 군이 이용된데 충격을 받은 「야루젤스키」장군(당시 육군대장으로 국방상)등 군지도자들은 「고물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고물카」는 사임하고, 탄광노동자출신의 당료인「에드바르트·기에레크」가 새 당제1서기로 취임했다.
76년여름, 노동자들은 또다시 거리로 나섰다.
역시 물가인상에 대한 항의였다. 곳곳에서 당사무실이 불탔고 철도레일이 파괴되기도 했다.
사태가 터진지 24시간도 채안돼 물가인상은 취소됐다. 하지만 그 사이에 경찰과 노동자들의 충돌로 17명이 사망했다.
폴란드에서 조직적인 반체제운동이 싹튼것은 바로 이사건직후였다. 반체제지식인과 노동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노동자 자위위가 결성됐다. 그다니스크일대에선 현 자유노조의 모체인「발트자유노조」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80년7월1일, 정부가 다시 육류등 생활필수품의 값을 40~70%올리면서 지금의 사태는 시작됐다.
구심점은 그다니스크의 레닌조선소였다. 여기서 결성된 공장연합파업위원회(MKS)와 그지도자「레흐·바웬사」는 8월의 뜨거웠던 두주일동안 파업을 벌이면서 근로조건개선과 함께 공산권에선 처음으로 정부에서 독립된 자치노동조합의 조직및 파업권, 정치범석방, 검열완화, 매체이용권등 일련의 사회경제개혁을 요구했다.
당국은 이들에게 굴복했다. 8월31일, 「바웬사」와 「야기엘스키」부수상이 역사적인 그다니스크협정에 조인함으로써 폴란드의 사회혁명은 본궤도에 올랐다.
9월6일엔 10년을 집권한「기에레크」당제1서기가 실각하고 그때까지 거의 알려지지않았던 당료「스타니스와프·카니아」가 뒤를 이었다. 9월17일엔 새로 결성된 자유노조, 솔리다르노슈치(연대 또는 단결이란 뜻)가 첫 전국대표자 모임을 갖고「바웬사」를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카니아」의 새정부는 안으로는 자유노조의 개혁요구, 밖으로는 폴란드의 사회주의진영이탈을 두려워하는 소련의 침공위협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작했다.
80년8월 폴란드와의 접경지역에서 예비군동원령을 내려 처음으로 군사개입가능성을 비쳤던 소련은 이해 11월, 12월, 그리고 81년3월과 6월, 9월등 거의 주기적으로 폴란드궁격부근과 폴란드국내에서 군사훈련을 벌이거나 비상대기령을 내림으로써 폴란드정부와 노조에 심리적 압력을 가해왔다.
소련의 위협에도 아랑곳없이 자유노조는 개혁을 위한 정부와의 숱한 대결에서 거의 전승을 거두면서 사실상 또하나의 정부가 돼갔다.
81년1월 노동자들은 토요일휴무제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여 승리했다. 3월19일 비드고슈치시 경찰의 노조원구타사건으로 빚어진 전국총파업위기도 정부의 양보로 해소됐다. 4월엔 자영농민들의 노조결성권도 따내 농민자유노조가 탄생했다.
검열도 크게 완화됐다. 사회전반에자유화와 민족주의의 기운이 팽배했다. 노동자들의 산업체자율관리권도 어느정도 인정됐다. 3월과 6월에 소련의 「브레즈네프」서기장은 개혁을 중단하고 노조를 탄압하라는 내용의 엄중한 경고를 계속 띄웠지만 폴란드당과 정부는 아직은 그럴 능력도 뜻도없었다. 오히려 당내민주화운동이 벌어져 7월에열린 임시전당대회에선 공산당사상 첫 민주선거방식으로「카니아」와 「야루젤스키」수상의 온건중도파가 재신임을 얻어 「사회주의개혁」노선이 확인됐다.
정부의 태도가 굳어진것은 8월과 9월 솔리다르노슈치가 첫전국대의원대회를 연후부터였다. 이대회에서 9백50만노조원을 대표한 8백여 대의원들은 자유선거, 노동자의 산업체 자율관리, 미디어이용권등을 요구하고 다른 동구국 노동자들에게도 자유노조결성을 촉구함으로써 소련의 분노를 자극했다. 이제까지 눌려있던 공산당내의 강경세력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10월18일 소련과 당내강경파에 의해 우유부단 하다는 비난을 받아온「스타니스와프·카니아」제1서기가 당중앙위에서 전격적으로 교체됐다. 국방상이며 수상인 「야루젤스키」대장이 당제1서기까지 겸임, 전례없는 권력집중이 이뤄지면서 정부는 노조에 대한 반격자세를 취했다.
노조의 파업권을 규제하고 정부에 비상대권을 주는 법안이 의회에 제출됐다.
그러나 『파업테러리즘』에 대한 「야루젤스키」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회불안은 더욱 고조됐다.
1월4일 사태해결을위해 「야루젤스키」와 「바웬사」, 그리고 가톨릭지도자「요제프·글렘프」대주교는 전례없는 3자회담을 가졌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11월17일 3개월만에 재개된 노조와 정부의 협상도 노조의 사회경제위구성요구와 정부측의 국민화합 전선주상이 맞선채 중단됐다.
12월2일 당국은 16개월만에 처음으로 무력을 사용, 소방사관학교의 비군사화를 요구하며 농성중이던 사관생도들을 강제해산 했다.
노조는 정부의 강공에 같은 강공책으로 맞섰다. 10일부터 그다니스크에서 열린 전국위원회는 정부에서 비상대권을주는 법안이 선포될 경우 전국총파업을 벌일것이며 12월17일을 「항의의날」로 정해 전국적시위를 벌이기로 의결했다.
정부가 비상사태를 선포한것은 이같은 결정이 내려진지 바로 몇시간후였다.【외신종합=본사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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