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 찾는 영국, 디플레 우려 빠진 유로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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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럽에서는 영국과 유로존의 경제상황이 뚜렷이 대비된다. 영국은 미국과 더불어 금리인상 시점을 저울질할 정도로 경기회복세가 호조다. 영국경제에 대한 전망기관들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는 선진국 중에서 가장 높은 3% 수준이다. 반면에 그동안 더디나마 회복세를 유지하던 유로존 경제는 주춤거리는 모습이다. 지난 2분기 성장률은 0%에 그쳤다. 3분기 들어서도 소비·투자 등 각종 경기지표들이 좋지 않아 소폭의 성장세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최근 ECB(유럽중앙은행)가 올해와 내년 유로존의 성장률 전망치를 각각 0.9%, 1.6%로 이전보다 하향조정했다. 이마저도 최근 부진한 경제상황을 감안할 때 매우 낙관적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유로존, 장기침체에 빠져들 우려

유로존 경제에 대한 우려는 우선 그동안 호조였던 독일 등 북유럽 국가들의 성장세가 크게 둔화하는 데서 비롯된다. 독일의 경우 2분기 성장률이 -0.2%(전분기 대비)를 기록했다. 독일 경제의 부진은 지난 1분기 온화한 날씨 덕분에 건설투자가 활발해지면서 고성장을 했던 데 대한 상대적인 영향이 크다. 3분기에는 독일경제가 다시 회복될 것이지만, 유로존 전체적으로 성장세를 제약할 요인들이 적지 않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빚어진 러시아와의 갈등으로 급감하고 있는 대 러시아 수출이 단시일 내 회복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러시아의 에너지 공급 차단 가능성에 따른 심리적 불안감이 투자·소비 위축으로 이어지는 효과도 크다. 11.5%에 달할 정도로 높은 실업률과 소득 정체 역시 구조적인 소비 위축 요인이다.

유로존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 9월 전년 동월대비 0.3%에 그치는 등 계속 낮아지고 있다. 이대로 가면 일본과 같은 경기침체와 물가하락의 악순환이 이어지면서 장기 침체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디플레 우려가 높아지는 가운데 드라기 ECB 총재가 고군분투 중이다. 지난 6월과 9월 초 금리인하에 나선 데 이어, 양적완화에 나설 의향을 여러 차례 피력했다. 그러나 중앙은행이 돈을 풀어도 부실채권에 발목 잡혀 있는 은행들이 문제다. 유로존 내 은행들의 부실채권 비율은 10%를 넘는다. 2% 남짓한 여타 선진국보다 훨씬 높다. 자체 생존이 위태로운 은행들이 위험 대출에 적극 나설지는 의문이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유로존 내 기업 대출은 마이너스 증가세이고 가계 대출도 정체 상태이다.

글로벌 위기 이후 영국이나 미국에서와 달리 유로존에서는 부실은행에 대한 지원과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탓이다. 양적완화로 인해 3월 초 1유로당 1.39달러 수준이던 유로화가 최근 1.26달러대로 10% 가량 하락하면서 수출여건은 개선되는 효과가 기대된다. 그러나 높은 역내교역 비중으로 인해 유로화 약세의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구조조정 통해 아일랜드·스페인 경제 개선

이 때문에 드라기 총재는 통화완화 정책 외에도 재정의 역할 증대와 경제의 구조조정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이른바 유럽판 아베노믹스인 셈이다. 그러나 경기부양 목적의 재정 완화에 대한 독일의 거부감이 크다. 재정 완화가 가능해지더라도 유로존 특유의 더딘 의사결정 구조를 감안할 때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중장기적인 성장 활력 회복을 위해 유로존은 노동의 유연화, 인프라 투자 확대, 상품시장의 경쟁력 제고 등을 위한 구조개선 과제를 안고 있다. 재정위기를 겪은 아일랜드, 스페인 등이 최근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는 것은 노동의 유연성 확보와 임금 하락 등 강제적인 구조조정 과정을 통해 경쟁력이 높아진 데 기인한다. 반면 위기 상황에 직면했지만 구제금융을 모면한 이탈리아는 구조조정에 소홀했고 여전히 마이너스 성장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올 들어 제로성장의 정체상태인 프랑스 역시 장기간 경쟁력이 약화하면서 이제 유로존의 골칫거리로 전락할 상황이다. 유로존 전체 GDP의 37%를 차지하는 두 나라의 경제가 부진을 지속하는 한, 유로존 경제의 회복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유럽시장서 한국 수출여건 악화

올해 1~8월 중 한국의 전체 수출에서 유로존과 EU가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6.5%, 9.6%이다. 유럽 전체로는 13.2%에 달한다. 과거에 비해 크게 낮아진 것이지만 미국의 12%, 일본의 5.8%보다는 높다. 최근 몇 년간 유럽경제의 침체가 지속하면서 우리의 대 유럽 수출도 역성장하는 부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올해 1~8월 중에는 대EU, 대유로존 수출이 각각 10.8%, 9.6% 증가하는 호조를 보였다. 성장세가 높아진 영국과 일부 유로존 국가들에 대한 수출이 급증한 때문이다. 유로화 강세의 효과도 작용한 바 크다.

그러나 유로존 경제가 다시 부진에 빠져들고 유로화가 약세를 보이면서 유럽 지역에 대한 수출여건이 악화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원/유로 환율의 경우 지난해 한때 유로당 1500원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유로당 1300원 수준으로 하락한 상태이다. 원화는 유로화와 연계되어 움직이는 여타 유럽 통화에 대해서도 강세여서 향후 유럽 시장에서 우리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이 약화할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이창선 수석연구위원은 서울대 국제경제학과 학사·석사, 미국 UC Davis 경제학 박사. 1991년 LG경제연구원 입사 이후 경제연구실, 금융재무연구센터에서 근무. 금융연구실장 역임. 현재 금융재무담당 수석연구위원

박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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