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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로 변한 발레리노들 보러 오세요”

중앙일보

입력

“지금껏 발레리나 강수진을 사랑해 주셨듯 이제 국립발레단을 사랑해주세요. 스타 한 명이 아니라 단원들 하나하나가 빛나는 발레단으로 만들겠습니다.”

지난해 12월 취임을 앞둔 기자회견에서 강수진(47) 국립발레단 신임 예술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주역 몇 명이 돋보이는 것이 아니라 군무 무용수들까지 빈틈없이 하나가 될 때 최고의 발레단이 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었다.

국립발레단의 10월 공연 ‘교향곡 7번’과 ‘봄의 제전’(10월17~19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은 그 다짐을 확인할 수 있는 무대다. 올 2월 정식 취임한 지 8개월 만에 선보이는 강 감독의 첫 레퍼토리기 때문. 본인이 30년 가까이 몸담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주요 작품들을 가져왔다.

안무가 우베 숄츠의 ‘교향곡 7번’과 글렌 테틀리의 ‘봄의 제전’은 각각 네오 클래식과 컨템포러리 스타일로, 이 두 작품을 묶어서 선보이는 건 세계 유수 발레단에서도 보기 드문 시도다. 표현이 까다로워 공연권을 얻기도 어렵다는 두 작품을 애써 함께 올리는 이유는 뭘까. ‘오직 단원들을 위해서’라는 것이 강 감독의 대답이다.

1일 예술의전당 내 국립발레단 연습실. 살색 삼각팬티에 가까운 연습복 한 장 달랑 걸친 남성 무용수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의 역동적인 음악에 맞춰 현대 무용에 가까운 격렬한 움직임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며 비지땀을 흘리는 모습이 클래식 발레에서 우아하게 파드되를 추던 왕자님들 맞나 싶었다.

한바퀴 런쓰루를 지켜본 강수진 감독은 살짝 예민해 보였다. 독일에서 온 72세의 트레이너 브론웬 커리와 함께 무용수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다가가 일일이 보완점을 지시했다. 이번 공연 준비로 여름 휴가도 반납했다는 그는 점심식사도 거른 채 잠시도 쉬지 않고 분주히 발레단 구석구석을 누볐다. 하지만 “첫 레퍼토리라 긴장되나”라는 물음엔 “전혀 아니”라고 단호히 답했다.

“이 작품으로 무용수들이 발전하는 게 중요하지, 뭘 보여주고 평가받으려는 게 아니니까요. 모르죠, 이 순수한 마음이 한국에서 어떻게 전해질지. 하지만 이 두 작품은 발레 세상에서 누구도 안무나 음악을 감히 평할 수 없는 최고의 작품이에요.”

-강 감독이 어떤 레퍼토리를 보여줄지 많이 궁금했습니다.

“단원들을 위해 고른 레퍼토리에요. 이걸 소화해내면 다른 수준으로 올라가리라 믿으니까요. 색다른 스타일이고 굉장히 파워풀한 작품이라 연습과정 자체가 의미가 있어요. 클래식 전막 공연은 한 사람 때문에 망치지 않지만 이 두 작품은 한 사람이라도 실력이 없으면 안 돼요. 그래서 실력 있는 발레단에만 허락하죠. 허락해준 분들은 나를 믿고, 나는 우리 국립발레단을 믿기 때문에 가져온 작품들이에요.”

-우리 관객에게 낯선 무대인데 살짝 소개한다면.

“베토벤 '7번 교향곡'은 음악 천재로 불렸던 안무가의 작품이에요. 무용수들의 몸이 그대로 악기가 되고, 움직임 자체가 악보가 되는 걸 느낄 수 있죠.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은 반대로 음악에 맞춰 춤추는 게 굉장히 힘들어요. 남자 무용수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파워풀해야 하니 이 작품을 하고 나면 모두 헤라클레스가 되죠.”

-두 작품이 곧잘 같이 공연되나요.
"두 작품을 묶겠다고 하니 독일에서도 깜짝 놀라요. ‘무용수들 다 죽겠네’라면서. 힘들어도 끝내고 나면 자기 만족이 어마어마할 거에요. 땀 흘리고 에너지 쏟은 후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그 느낌 때문에 무용을 하는 거니까.”

-우리 관객은 고전 발레나 드라마 발레를 좋아하죠.

“클래식을 좋아하는 건 취향이고, 거기에 대해서 뭐라 말할 순 없죠. 하지만 치킨 샐러드를 좋아한다고 30년 동안 그것만 주면 몸에 좋지 않아요. 이런 작품도 있다고 소개하는 게 관객에 대한 의무라 생각해요. 클래식만 하면 우리도 편하지만 그래선 문화가 발전할 수 없어요. 단원과 관객이 같이 발전할 수 있는 작품을 계속 들여올 거에요.”

-한국 발레는 아직 러시아 고전 위주인데, 외국 발레단은 어떤가요.

“큰 발레단은 다 해요. 고전만 하면 망하죠. 관객들 취향이 다양하거든요. 고전이 베이스인 건 분명해요. 베이스가 돼야 다른 테크닉도 소화하죠. 한국은 클래식 기초가 탄탄한데, 21세기 무용수는 많이 배워야 해요. 21세기 발레단은 모든 작품들을 다 소화할 수 있어야 퍼스트 클래스로 인정받죠. 러시아, 프랑스 어느 나라든지 머리가 깨질 정도로 다양한 스타일을 흡수하고 있어요. 우리도 내년 라인업에 고전·스토리 발레·모던 발레 다 넣었어요.”

-한국 발레에 창작 레퍼토리가 절실한데요.

“내년에는 단원들이 직접 안무해 보는 창작 이브닝도 계획중이에요. 좋은 안무가로 탄생할 기회를 주는 거죠. 하지만 서두르면 안 돼요. 아무리 고디바 초콜릿을 갖다줘도 한꺼번에 왕창 먹으면 살만 찌고 좋은 줄 모르듯, 퀄리티를 높일 시간이 필요하죠. 우리 피 속에 ‘빨리빨리’ 서두르는 성향이 있는데, 사실 우리가 못하는 게 없어요. 경제나 문화나 푸쉬를 많이 하는데, 결코 서두를 필요가 없죠. 바깥에서 보는 결과만을 위해 눌려서 하는 건 좋지 않아요. 꾸준히 간다는 게 중요하죠. 좀 늦더라도 100퍼센트 할 수 있는 상태에서 힘을 모을 때 엄청난 에너지가 나올 거라 믿어요.”

무엇을 물어도 그의 답변은 ‘단원들’로 마무리됐다. 그만큼 온 신경이 단원들에게 집중돼 있고 단원들과의 스킨십을 소중히 하는 모습이었다. 이동 중에 부상으로 몇 달째 쉬고 있는 수석무용수 이동훈을 만나자 안부를 챙기며 “우리 동훈씨가 이제 연습을 다시 시작했어요. 응원 좀 많이 해주세요”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저는 단원들이 너무 존경스러워요. 예술이 없으면 슬플 거에요. 이 각박한 사회에서 순수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잖아요. 예전엔 보통이었던 느낌들이 이제 너무 귀해졌어요. 파트너랑 손잡고 땀 흘려가는…. 그게 보통 사는 모습이었는데 이제 무용수에게나 가능한 일이죠. 다행히도 무용수라서 감사해요. 부대끼면서 서로 존중하는 자체가 아름답고, 숨 쉬는 이 느낌을 함께 하는 단원들이 사랑스러워요.”

-30여 년만의 서울 생활에 적응이 잘 되나요.

“한국이 많이 변했어요. 모든 걸 디지털에 의존해 사는 것이 예술 쪽에는 마이너스인 거 같아요. 유럽은 오히려 슬로우로 가도록 자제하면서 인간성이 한꺼번에 없어지는 걸 경계하는데 우리는 너무 빨리 가려 하죠. 예술 안에선 슬로우로 가는 느낌이 좋아요. 바깥 세상에선 기계적으로 사는 느낌이 들어 착잡한데 극장에 발 들여놓는 순간 마음이 편해져요. 한국인만이 가진 특별한 정이 예술 안에서는 유지되는 것 같아서요. 우리는 순수한 영혼이 없으면 표현이 안되니까. 후배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자체가 행복이란 걸 새삼 느끼고 있어요.”

여름 내내 휴가도 안 가고 뭐 했느냐 물으니 “일했다”고 간명하게 답한다. 살면서 한 번도 휴가를 가본 일이 없고, 지금은 적응하는 단계라 무조건 발레단에 집중해야 한단다. 조금이라도 단원들에게 시간을 더 써야 한다는 것이다.

“전 놀 줄 몰라요. 놀아보지 않은 건 아니죠. 하지만 흥미를 못 느꼈어요. 흥미를 느낀 유일한 게 발레였고, 이제 내 선택으로 예술감독이 됐으니 나 이전에 발레단이 중요해요. 처음부터 확실했어요. 내 임기 동안 한 단계 발전시키는 게 목표죠. 재미를 느끼면 그것만 하고 싶어지지 않나요. 단원들도 그 기분을 알게 해주고 싶어요.”

-너무 교과서적인 삶 아닌가요.

“더도 덜도 아니고 이게 그냥 내 삶이에요. 누구나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건 아니죠. 나는 좋아서 하는 거고. 내가 강해 보이는 건 그만큼 죽도록 고생했기 때문이에요. 근데 거기에 감사하죠. 나의 가장 큰 장점이 단순하다는 거에요. 절대 복잡하게 생각 안 해요. 힘들고 죽고 싶은 날도 있지만 그 다음날 또 살아보는 거죠. 그 결과 지금의 내가 있어요.”

그는 얼마 전 2016년 7월 22일을 공식 은퇴 일로 정했다. 은퇴 작품은 ‘오네긴’. 무용수로서의 무대가 내년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의 내한공연과 은퇴 공연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갈수록 느는 작품이라 ‘오네긴’을 택했어요. 테크닉을 넘어 나이가 들어도 보여줄 수 있는 게 많거든요. 은퇴작으로 가장 완벽한 작품이죠.”

은퇴 시점을 못박으니 아쉽지 않느냐고 물으니 역시나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보세요. 난 오늘 죽어도 돼요. 오늘까지 제 삶, 요만큼도 후회 없어요. 실수에 대해서도 전혀 후회 없어요. 실수가 없었으면 배우지 못했을 테니까요.”

삼단같이 검은 머리, 나이를 잊은 외모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에 찬 대답만 하는 이 사람, 문득 진짜 사람인가 싶었다. 혹시 흰 머리도 안 생기느냐 물으니 정수리에 새치가 많아 꾸준히 염색을 하고 있단다. 왠지 마음이 놓였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국립발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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