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교포 2명 극적귀향|8순의 김점순할머니·7순의 안봉중 할아버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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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성남·울진=연합】여정만리 중공료령성에 살던 8순의 할머니와 만주땅에서 고국의 땅을애타게 그리던 7순의 할아버지가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80세의 김점순할머니는 지난8월8일 44년만에, 그리고 70세의 안봉중할아버지는 11월30일, 37년만에 각각 꿈에도 그리던 가족들을 찾아온 것이다.

<김점순씨>
중공 요령성 무순현에서 살고있던 김점순할머니는 대한적십자사의 주선과 안내로 큰아들 박철수씨(53·농업·평택군현덕면덕목리), 작은아들 병희씨(49·성남시판교동247·두창약방), 큰딸 순자씨 (60·대구시신암동), 큰사위 김태봉씨등 가족들의 품에 안겼다.
지난8월8일하오5시10분 김포공항에서 박씨형제는 검은색롱치마에 흰색저고리 차림에 간단한 여행가방 2개를 들고 나오는 어머니를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철수씨는 36년, 병희씨는 33년간의 이별의 설움과 재회의 기쁨을 터뜨리면서 어머니품에 안겼다.
박씨일가가 중공에 건너가게 된 것 은 일제하인 1937년.
어려운 살림을 견디다 못해 대구시중구대신동127 옛집을 뒤에 두고 일가족이 기약없이 중국땅으로 향했다.
김할머니는 당시 36세, 장남철수씨는 9살, 병희씨는 5살.
젊은 엄마손에 이끌려 고향을 떠났던 철수씨는 17살에, 병희씨는 16살에 각각 고국으로 돌아온 뒤 6·25가 터지면서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고 말았다.
그 뒤 74년 병희씨는 어머니의 생사를 확인, 서신교환을 시작했고 7년 만에 어머니를 모시게된 것이다.
김할머니는 아들의 초청을 받고 지난2월초 집단농장을 떠나 북경까지 갔었으나 서류미비로 귀가했다가 8월4일 외손자 남국진씨(27·중학교체육교사)의 안내로 북경·광주를 거쳐 홍콩에 도착, 5일만에 귀국했다.

<초정>
74년 중공과 서신교환이 가능해지자 병희씨는 당시 성남시 판교우체국장 이기태씨(50·현 성남우체국우편계장)를 찾아가 어머니에게 편지를 띄울 길이 없을까 상의한 뒤 옛 주소로 편지 2통을 보냈다.
큰 기대를 안고 보냈던 편지였는데 2개월 뒤 뜻밖의 회답이 날아왔다.
『나는 병희씨의 여동생 덕향(46)과 결혼한 매제 남청식(48)입니다』로 시각된 서투르나마 한글로 쓴 편지였다.
『나는 자식 5형제를 두고 장모님과 함께 잘살고 있읍니다』라고 끝맺은 편지를 읽고 병희씨는 마치 어머니를 만난 것 같은 기쁨으로 눈물을 흘렸다.
2개월에 한번씩 어머니소식을 듣던 병희씨는 형님·누님등과 의논 끝에 어머니를 모셔 오기로 하고 77년8월 대한적십자사를 찾았다.
대한적십자사의 안내대로 서류를 갖춰 제출한 뒤 1년만인 79년 초청이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고 80년6월에는 어머니의 홍콩 체류비·항공요금등 55만원을 외환은행에 예치하라는 연락을 받고 모든 수속을 끝냈다.

<귀국>
편지를 받은 김점순할머니는 같이 사는 사위 남씨에게 재촉하여 답장을 쓰게 했고 손자 국진, 국평(24)씨 등에게 외삼촌얘기를 수없이 해주었으며 아들로부터 오는 편지를 기다리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편지가 오가던 중 79년 고향에 갈 수 있다는 중공당국의 연락을 받고 남씨가 동분서주하여 서류를 준비했다.
평생 외출한번 해본 일 없는 김할머니에게 「여권」이라는 수첩이 주어 졌고 지난2월초 가족과 동네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외손자 국진씨와 함께 북경행 열차에 올랐다.
그러나 출국서류미비로 북경에서 집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이로부터 6개월 뒤.
다시 국진씨와 지난8월4일 북경행 열차를 타고 북경에 도착, 비행기편으로 7일 광주까지와 1박한 다음 홍콩을 거쳐 꿈에도 그리던 고국에 돌아왔다.

<안봉중씨>
안봉중씨(76·중공길림시거주)는 37년10개월만인 지난달 30일하오5시10분 홍콩을 거쳐 김
포공항에 도착, 귀국했다.
안씨는 대한적십자사가 지난1년6개월동안 중공당국과 벌인 집념 어린 송환교섭 끝에 귀국, 꿈에도 그리던 경북울진군기성면척산리고향을 찾아 아들 안호열씨 (48·기성면총무계장)를 만나 감격의 재회를 했다.
7순이 넘는 안씨가 생활고 때문에 고향을 등지고 가족과 함께 만주로 떠난 것은 지난40년.
만주 길림시에서 열심히 일해 농부 30여명을 거느리는 대지주가 돼 단란한 생활을 하던 안씨 가족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안씨를 제외한 가족3명이 43년11월 먼저 귀국했다.
만주로 떠날 당시 큰아들 호열씨는 6살이었으며 그곳에서 둘째 충렬씨(39·대구시중구동인4가동사무소직원)를 낳아 부인 황위남씨(79년10월28일 사망)와 함께 4식구가 살았었다.
한편 어린 두 아들의 손목을 잡고 고향으로 먼저 돌아온 안씨의 부인 황씨는 그동안 두 아들을 뒷바라지해 공무원으로 성장시킨 뒤 남편의 생사라도 알수 있기를 애타게 기다리다 지난 79년10월28일 노환으로 숨졌다.
안씨의 부인이 숨진 뒤 2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12월 초순 호열씨의 6촌 동생 성렬씨로부터『아버지가 중공 길림성길림시교구 쌍희공사 신흥대대에 살고있다』는 편지가 왔다.
이때부터 호열씨와 부친간에는 서신연락이 계속돼 가족사진도 보내는 등 매월 2∼3차례씩 편지가 오갔다.
호열씨는 지난해5월 대한적십자사로부터 중공에 있는 가족을 초청할 수 있다는 연락을 받고 지난해 6월 부친귀국에 필요한 관계서류를 적십자사에 제출했다.
호열씨형제는 이 같은 서류를 모두 제출한지 1년2개월만인 지난달 30일 김포공항에서 새어머니 이향이씨(73)와 함께 트랩을 내려온 아버지와 극적인 상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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