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산책] 통산 30승 아줌마 골퍼 잉크스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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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잉크스터가 지난 22일 XCANVAS 여자오픈에서 우승한 뒤 클럽하우스에서 간편복 차림으로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아래 사진은 미국 골프잡지인 ‘골프월드’에 게재된 것으로, 두 딸과 소프트볼을 하고 있는 잉크스터의 모습이다.

"경쟁을 좋아해요. 내 피(본성)가 그런가 봐요."

미국의 여자골퍼 줄리 잉크스터. 45세의 아줌마인 그는 LPGA 투어에서 뛰는 한국 여자선수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다. '가정과 골프 양쪽 다 모범적인' 삶을 꾸리고 있기 때문이다. LPGA 통산 30승의 대기록. 다정다감한 성품인 그는 특히 한국 선수들에게 따뜻한 편이어서 더욱 평판이 좋다.

그는 지난 22일 끝난 한국의 XCANVAS 여자오픈(뉴서울골프장)에서 우승컵을 안았다. 한국에 네 번 와 두 번째 우승. 2002~2003년엔 제일모직 아스트라와 스폰서 계약을 하기도 한 대표적 지한파(知韓派)다. 그는 "가정과 골프의 균형을 맞추는 건 어렵다. 하지만 내 선택에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 대회를 위해 22일 바로 미국으로 출국했다.

◆ 골프장에서 공 줍던 소방관의 딸

미국에서 특히 존경의 대상인 소방관의 막내딸로 그는 태어났다. 15세 때 동네 골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게 골프채를 잡게 된 계기다. 방과 후 골프장에서 공을 줍고 프로숍 일을 거들면서 골프를 배웠다. 그러면서 금세 간단찮은 실력을 갖추게 된다. 그때 그 골프장 레슨프로였던 청년 브라이언 잉크스터가 지금의 남편이다. 둘은 잉크스터가 대학(새너제이)에 다니던 1980년에 결혼했다.

"레이디티보다는 화이트티나 블루티에서 티샷을 하곤 했어요." 잉크스터는 대학 4년 내내 미국 올스타에 뽑혔다. 그의 아마추어 기록은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에 비견된다. 잉크스터는 80~82년 US여자아마추어 대회 3연패를 했고, 우즈도 91~93년 US아마추어에서 3연패 했다. 강인한 정신력이 필요한 매치플레이 대회 3연패의 기록은 스트로크로 치러지는 메이저대회 3연패보다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잉크스터는 "명예의 전당 입회보다 그때의 기록이 더욱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잉크스터는 83년 프로로 전향해 LPGA 신인왕에 올랐다. 이듬해 메이저대회에서 2승을 거뒀고 86년에 4승을 챙기며 전성기를 달렸다.

◆ "우승보다 더욱 달콤한 건 가족"

첫딸 헤일리는 90년에 태어났다. 그러면서 잉크스터는 슬럼프에 빠진다. 그 전까지 평균 2승씩을 거뒀지만 90년엔 우승을 하지 못했다. "헤일리를 낳고 6주 만에 투어에 출전해 아기를 데리고 나갔지요. 골프는 잘 안 됐고 아기 침대와 기저귀 등을 들고 호텔을 전전했어요.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지만 내가 제대로 하는 것인지 회의가 들었지요. 이곳저곳에 돌아다니니 아이가 심리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도 됐고요. 아이는 그런 것도 모르고 울기만 하니 마음이 더 아팠어요."

91년과 92년 1승씩을 하더니 둘째딸 코리를 임신한 93년부터 96년까지는 아예 우승을 하지 못했다. "최고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이기적이어야 해요.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나도 그랬어요. 하지만 아이가 생긴 뒤에는 에너지를 100% 나 자신에 투자할 수 없었지요."

그는 "그러나 가족이 운동보다 더 달콤했기 때문에 슬럼프 중에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며 "은퇴하고 미아 햄(미국의 여자 축구선수)을 좋아하며 축구를 즐기는 큰딸 헤일리의 경기장을 쫓아다니는 평범한 엄마가 될까도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3주 이상 연속 출전은 하지 않는다. 가족과 골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다. "그래도 대회에 참가하느라 헤일리의 축구 경기를 다 볼 수 없는 게 미안해요. 골프 시즌이 끝난 겨울에는 딸들의 농구 코치를 맡아 주지요."

◆ 한국 대회 우승이 슬럼프 탈출 계기

잉크스터가 다시 일어선 계기는 한국에서다. 97년 레이크사이드 골프장에서 벌어진 삼성월드챔피언십에서 그는 연장 끝에 우승했다. 4년여 만에 첫 우승이었다. 40위권이던 상금랭킹도 6위로 뛰어올랐다.

"딸들이 크면서 골프 연습에 시간을 더 투자한 결과가 아니었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는 "그보다는 좋은 엄마가 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모든 경기에 목숨을 걸다시피했는데 가정을 꾸리면서 생긴 마음의 여유가 다시 골프에 집중하는 동력이 됐다"는 설명이다. 한국에 대한 그의 친근감은 슬럼프를 끊는 무대가 한국이어서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잉크스터는 99년엔 5승을 거두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그리고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마치 즐기듯 플레이하며 정상급 선수로 투어 생활을 하고 있다.

◆ "박세리도 충분히 극복 가능"

슬럼프에 빠진 박세리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몇 년간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겨냈습니다. 자신을 믿고 꾸준히 노력하면 충분히 극복이 가능하다고 봐요. 가족을 갖는 것도 좋은 방법일 거예요."

잉크스터는 올해 미국 LPGA 무대에서 아니카 소렌스탐(스웨덴)의 4관왕을 저지하고 있는 선수다. 소렌스탐은 27일 현재 평균 타수, 드라이브샷 거리, 아이언샷 적중률에서 1위지만 그린 적중시 평균 퍼팅 수(1.74)에서는 잉크스터(1.70)에 이어 2위다.

성호준 기자

▶출생=1960년 6월

캘리포니아주 샌타 크루즈

▶가족=남편 브라이언 잉크스터,

딸 헤일리(15).코리(11)

▶프로데뷔=83년 새너제이 대학

졸업과 동시(그해 신인왕)

▶우승=LPGA 통산 30승

(메이저대회 7승 포함), 해외투어 2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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