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4, 목적이 아닌 협상도구로 … 북 운신 폭 넓혀줘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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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세 외교부 장관(왼쪽)과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7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서울-세종청사 간 화상 국무회의 시작 전에 이야기를 하고 있다. [뉴스1]

지난 주말 북한 최고위급 대표단이 방남한 걸 계기로 5·24 조치 해제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7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5·24 조치 해제 여부를 묻는 질문에 “앞으로 논의할 시점이 되면 국가안보실(NSC)에서 여러 측면을 감안해 합리적인 논의를 할 것”이라고 답했다. 5·24 조치 해제 논의는 북한이 먼저 천안함 폭침 및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 피살 사건에 대해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해야 가능하다는 게 정부의 공식 입장이었던 만큼 윤 장관의 발언은 종전보다 유연해진 셈이다.

 5·24 조치가 수명을 다했다는 지적은 정부 내에서도 고개를 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당국자는 “사실 5·24 조치대로라면 박근혜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한을 평창 행사에 초대한 것은 물론이고, 우리가 어떤 대화도 제안해선 안 된다”며 “남북이 서로 말은 안 하고 있지만, 그간 제안한 것 중에 5·24 조치와 상충되는 내용이 상당수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정부는 5·24 조치 해제가 자칫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흐름에서 한국이 이탈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5·24 조치를 북핵·탄도미사일 발사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와 연계해온 것이다. 지난 6월 유엔안보리에 제출한 안보리결의 2094호 국가이행보고서에는 “5·24조치에 따라 2094호 결의 부속서에 명시된 핵·미사일·화학무기 관련 8개 품목을 통제하고 있다”고 명시했다. 하지만 이런 사정도 달라졌다. 대북 제재를 담당하는 미 재무부 고위당국자는 지난 8월 방한해 “남북 사이에는 유엔안보리 결의에 언급되지 않은 많은 관계가 있다”며 “그런 관계는 한국 정부가 북한과 어떤 사이가 되고 싶은지에 달려 있고, 금융 제재나 무기 거래 차단 등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과는 별개”라고 했다. 5·24 조치와 유엔안보리 결의가 별개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5·24 조치의 핵심인 남북교류 중단이 유명무실해진 현실도 ‘해제론’에 일조하고 있다. 특히 남북경협에 참여한 기업들의 경우 5·24 조치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7일 통일부가 보고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5·24 조치 당시 1000여 개 기업이 남북교역에 참여했고, 43개사가 정부 승인으로 840억원 규모의 투자를 했다(개성공단과 금강산은 제외). 하지만 이후 운영난에 빠진 기업들이 많아 통일부가 220개사에 560억원의 특별대출까지 해줬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전문가들 사이에선 북한의 변화와 남북관계 개선을 목표로 삼은 5·24 조치가 오히려 남북관계에 ‘동맥경화’를 유발하고 있는 만큼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화여대 박인휘(국제관계학) 교수는 “남북관계가 성숙할 수 있는 제도적 제안도 함께하면서 사과를 요구해야지, 북한에 공이 넘겨져 있다는 식의 입장만 고수하면 북한의 행동 반경도 좁아질 수밖에 없다”며 “박근혜 정부가 대북관계 개선에 진정성을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공세지향적인 북한을 어떻게 잘 다뤄 운신의 폭을 넓혀줄지 적절한 전략을 세우진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5·24조치의 목적이 1차적으론 북한에 경제적 고통을 주되, 궁극적으론 이를 통해 북한의 정책과 태도를 변화시켜 관계 개선을 유도하자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고통뿐인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도 적잖다. 김중호 수출입은행 선임연구원은 “5·24조치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상대방의 변화를 촉구하는 도구”라며 “북한이 중국을 통해 상당 부분 필요한 물자를 해소하고는 있지만 불가피하게 광물자원을 국제단가보다 싸게 파는 등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말했다. 고려대 조영기(북한학과) 교수도 “이젠 5·24 조치를 협상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며 “처음부터 북한의 사과 등을 기대하기는 힘든 만큼 북한으로 하여금 인도적 지원이나 교류·협력 사업을 먼저 받아들이게 하고, 대화를 계속해 결국 태도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유연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유지혜·정원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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