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와 시어머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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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어제 본지 사회면엔 한 며느리의 자살이 유달리 크게보도되었다.
그것은 60대 시부모를 장남대신 차남이 모시는데 대한며느리의 부만과 갈등에 연유하고 있다.
그점에서 보면 한 가정주부의 자살을 수반하게된 한 가정의 불행을놓고 이러니 저러니 논의하는 일이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생각하면 이불행한 자살사건은 그 한 개인이나, 그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요, 우리사회 모든 주부, 모든 가정의 문제로 귀착되는 실마리가 되고 있음을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전통적 가족제도가 점차 붕괴하고 새로운 가족제도의 형성이 진행중인 우리사회의 현실과 땔수 없는 연관을 갗고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속에 과거의며느리는 흔히「시집살이」의 슬픔과 고통을 씹으며 인종의 나날을 감수했다. 사회제도의 룰이 너무나 완강하고 사회도덕률이 확고했던 시대라서 며느리의 고통극복방법은 인종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에서 며느리의입장은 옛날과는 달리 크게 개선되었고 가계를 주도하며 가족의 행부을 관리하는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존재로 발전하고 있다.
그렇다곤하나 오늘이라고해서 며느리의 정신적인 시집살이가 완전 해소되었다고 할수는 없으며 고부사이에존재하는 거북하고 괴로운 관계가 사라진것도 아니다. 경우에 따라선 구박받는 시어머니의 출현으로 문제가 호전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시어머니의 불만은 잘 길러낸 아들을 시원찮은 며느리가 들어와 알뜰하게 보살피지 못한다는 부족감의 소산이겠으나 그런 시어머니밑에서심리적으로 강산속에 하루하루를 샅아야하는 며느리의 입장도 이해하기 어렵지않다.
더우기 이런 고부사이에서 나머지가족들이 겪어야하는 불안과 고통은그 또한 보통 일이 아니다.
가족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한 가정의 행복과 사랑을 원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라고 그걸 원하지 않을리는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서로를 경계하고 미워한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문제의 자살한 주부의 경우엔 거기에 두가지 문제가더복합되어있다. 하나는 차남의 시부모봉양이란 문제요, 다른 하나는 결혼전부터 모시지 않던 시부모를 새로 모시게된 사실이다.
부모봉양은 원칙적으로 자식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책임이있다. 부통적관념에서나 혹은 오늘의 경우라도 대개는 장남이 모시는것이 분행이다.
그러나 그것은 철칙은 아니며 꼭장남이 아니라도 형편이 나은 쪽이모시는것이 합리적이라고 할수있다.
특히 자살한 주부는 지금까지 자신이 중심이 돼왔던 가족구성이 시부모의 출현으로 붕괴되었음을 괴로와했고 아울러 자신의 소속감이 박탈된다는 좌절을 극복하지 못하고있다.
이같은 좌절을 극복할수 있느냐 없느냐하는것은 개인의의지력의 문제겠지만 시부모와 남자들 그밖의 가족구성원이 이들 사이에서 적절히 조정하고 중재하는 애정어린 노력이 결핍되어있었음도 탓할수는 있겠다.
몇달동안의 생활속에서 가정의 불화를 구하는 공동의 노력이 중요했겠거니와 그것이 불가능했을 때 파국만은막도록 차선의 대안을 강구하는 노력도 아쉬웠던 것같다.
우리는 자살한 주부와 남은 가족의 불행에 동정을 금할수 없으며 그것이 결코 그들만의 불행이 아닌 우리사회 적지않은 가정의 문제임도 알고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어려운 문제라고 그저 방치할수만도 없음이 분명하다.
일본과 같은 나라에선 벌써 대가족제도로의 복귀를 하나의 국책으로 삼아 한집에 여러가구가 동거하는 경우 세금상의 특혜까지 주고 있다. 결국 동양적 가정의 미덕을 존중하고, 또 그것을 한 사회의 도덕적 기반으로 보호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가정의 평화도 결국 사랑과 이해없이는 불가능하다.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사랑과이해의 실천에 한층 관심과 노력이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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