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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시론

북 실세 3인 방남은 경제협력 위한 포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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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조동호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원장

‘진화하는 대북정책’. 박근혜 정부가 출범 초기 제시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기본 원칙이다. 전개되는 상황에 맞춰 대북정책을 변화시킴으로써 한반도 상황을 능동적으로 관리하겠다는 뜻이다.

 타당한 원칙이고 당연히 그래야 할 원칙이지만 그동안은 주무 부처인 통일부조차 잊어버리고 지냈다. 오히려 수동적으로 대처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본격 가동할 기회도 여러 번 놓쳤다.

 곰곰이 생각하면 김정은의 북한이 추구하는 방향은 명백하다. 경제를 살리는 길이다. 다만 정치적 기반을 공고화하는 게 급선무였을 뿐이다.

 3년 전 겨울 김정은은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다. 김정일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예정보다 빨리, 서른도 안 된 어린 나이였다. 최우선 과제는 정치적 안정성의 확보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아버지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었어도 권력 상층부로부터 인정받는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외관계는 나중이었다. 남북관계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아버지와 달리 각종 최고 지위에 신속히 오른 것도 그 때문이다. 당의 간부를 수시로 바꾸고, 장성의 별을 붙였다 뗐다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제는 내가 최고지도자’라는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작업이었다. 장성택 처형은 그 절정이었다. 이젠 후견인도 필요 없다는 뜻이고 이 세상에 자신을 ‘정은아’ 하고 아래로 부를 수 없다는 경고였다.

 그러나 정권의 확고한 기반이란 정치적 안정성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경제적 안정성이 부가되어야 한다. 권력층으로부터의 충성 확보 못지않게 일반 주민들로부터의 지지 획득이 필수적인 까닭이다.

 결국 경제 상황의 개선이 핵심적인 과제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치적 안정성이 마련되어 가던 지난해 봄, 김정은은 ‘경제·핵 병진노선’을 내세웠다. 아직 확실한 안보가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핵을 포기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경제를 더 이상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인식의 표현이다. 마치 박정희 대통령 시절 “싸우며 건설하자”는 구호의 북한판 표현인 셈이다.

 경제 문제의 해결은 김일성의 손자, 김정일의 아들이라서 최고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니라 그럴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민생활 향상’이 근래 북한 정책의 최고 화두로 대두된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자본이다. 내부 자본이 없는 북한으로선 외부 자본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난해 말 기존 4개 경제특구에 더해 7개의 경제특구, 3개의 관광특구를 지정했다. 심지어 지방에도 13개의 경제개발구를 만들었다. 올해 7월에는 6개의 경제개발구를 추가했다. 북한 전역을 외국인 투자유치 지역으로 만든 것이다. 네 귀퉁이에만 특구를 만들었던 김정일 시대와는 사뭇 다른 적극적 행보다.

 그러나 북한에 선뜻 투자할 나라는 없다. 미국은 아예 무시하고 유럽연합(EU)은 지원 정도만 할 뿐이다. 러시아는 여력이 부족하다. 일본은 납치자 문제가 걸려 있고 진전이 있다 해도 본격적 투자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중국도 쉽지 않다. 최근의 냉랭한 관계도 장애지만 아직 중국 내의 낙후지역 발전이 더 시급하다. 나진에 대한 관심도 동북 3성 개발 목적이다. 결국 남한밖에는 대안이 없다.

 따라서 이번 핵심 실세 3인의 남한 방문은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실 폐막식 참가는 안 해도 그만이고 고위급 회담 수락이라면 통보만 해도 그만이었다. 십중팔구,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관계 분위기 조성의 목적이라고 읽힌다. 김정은 전용기를 타고 온 것이나 경호원을 대동한 것은 그만큼 무게감을 더하기 위한 제스처다. 최용해와 김양건의 양복과 달리 황병서의 군복은 군부도 남북관계 개선의 의지를 갖고 있다는 시그널이다. 지난달 27일 북한 외무상으로는 15년 만에 처음 유엔에서 연설한 이수용이 경제발전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이례적이었다.

 그렇다면 ‘진화하는 대북정책’을 되살려야 한다. 경제가 우선이 된 북한의 상황을 능동적으로 활용하고 우리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남북경협을 강화하자는 뜻이다. 물론 핵 문제가 있고 인권 문제도 있다.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러나 이는 우리 혼자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자관계의 틀에서 장기적으로 풀어나갈 수밖에 없다.

 이제는 다자와 양자를 병행해야 한다. 핵·인권과 경협도 병행해야 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의 무조건적 포용(engage) 정책이나 이명박 정부의 일차원적 고립(enclave) 정책에서 벗어나 북한의 변화를 다각적으로 유도(entice)하자는 의미다. ‘경제·핵 병진노선’에서 핵보다 경제의 비중을 늘려나가도록 격려(encourage)하자는 뜻이기도 하다. 북한의 변화를 원한다면 북한이 변화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진화하는 대북정책’의 핵심이고 본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추구하고자 했던 방향이다.

조동호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원장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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