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사설

북 실세 방한, 상생협력과 평화의 첫걸음 되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인천 아시안 게임 폐막일 북한 대표단의 방한은 여러모로 파격이었다. 군 총정치국장을 비롯한 김정은 체제의 핵심 3인방이 남한을 찾았다. 남북 관계사에서 북한 실력자들이 한꺼번에, 그것도 공개리에 남한을 찾은 것은 전례가 없다.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은 북한의 최고 실세다. 노동당 안의 당이라는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거쳐 군에 대한 당의 지도를 총괄하는 현직에 올랐다. 지난달엔 국가최고기구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최용해 국가체육지도위원장(당 비서 겸임)은 전임 총정치국장이었다. 두 사람은 201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이후의 권력 교체기 김정은 노동당 제 1비서를 떠받쳐온 쌍두마차다. 김양건 대남 담당 비서는 김정일 시대 이래 대남 업무를 관장하고 있다.

 대표단 방한 성사 과정도 전격적이었다. 하루 전날 방문을 타진해 이뤄졌다. 남북 관계의 특수성과 반전을 실감케 해준다. 북한 권력 핵심의 동시 방한은 김정은 체제가 반석에 올라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 명의 방한은 의미가 자못 크다. 방한 그 자체가 남북관계를 개선하려는 북한의 의지라 할 수 있다. 황병서는 “이번에 좁은 오솔길을 냈는데 앞으로 대통로로 열어가자”고 했다. 남북관계 개선과 긴장 완화의 단초가 마련된 셈이다. 남북이 이번에 합의한 2차 고위급 접촉이 기대를 모으는 이유다.

 세 명의 방한은 북한이 외교 다변화를 꾀하는 와중에 이뤄졌다. 북한은 북·중 관계가 예전 같지 않으면서 러시아·일본·유럽연합(EU) 등과 적극적으로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다. 핵 개발과 인권 문제로 인한 고립을 탈피하기 위한 수세적 성격도 있지만 북한의 대외 관계 강화는 바람직한 일이다. 결국 국제사회로의 편입으로 가는 길이다. 북한은 경제개발구(특구) 지정, 투자설명회를 통한 외자 유치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북한의 이런 외교·경제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 경제의 중국 의존은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대중국 무역이 북한 전체 교역에서 90%를 차지할 정도다. 2010년 천안함 사건 이후 우리의 5·24 대북 제재 조치에 따른 교역 공백을 중국이 메우고 있다.

 그런 만큼 향후 협상에서 5·24 조치나 금강산 관광 중단 해제를 적극 고려해야 한다. 북한의 요구에 응한다는 소극적 발상에서 벗어나 북한 문제의 최대 당사자인 우리의 입지 확보를 위해서라는 적극적 발상이 필요하다. 이 조치 해제에 따른 대북 교역 재개와 경제협력은 우리 기업에도 새로운 활력소가 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북한 핵 문제다. 9월 29일자 사설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북한 핵 문제 해결을 모든 문제에 우선하는 정부의 기존 대북 전략은 재검토돼야 한다. 북핵 문제는 반드시 해결돼야 한다. 하지만 단계적이고 장기적인 과제로 다뤄 남북 간 다른 현안들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하는 현실적이고도 창의적 노력이 필요하다. 북한 역시 군사적 위협과 도발을 중지해야 한다. 그래야 신뢰의 선(善)순환이 생겨난다.

 남북 관계는 천안함 사건 이래 관계개선의 계기를 잡지 못했다. 간헐적 대화가 있었지만 불신과 대립의 불완전한 평화(incomplete peace)의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올 들어 남북 고위급 접촉이 이뤄지면서 이산가족 상봉도 한 차례 성사됐지만 도돌이표의 판(板)은 그대로였다. 북한 대표단의 이번 방한이 남북 상생의 협력과 화해·평화 구축의 새 판을 짜는 첫걸음이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