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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비야의 길 !

지친 구호팀장의 구원투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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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비야
유엔 자문위원

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막판에 파견근무지가 시리아에서 필리핀으로 바뀌었을 때는 주말을 이용해 산과 섬으로 돌아다닐 수 있을 줄 알았다. 지난해 발생한 하이엔 태풍 재난 구호는 더 이상 24시간 대기를 요하는 긴급 구호현장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레포츠 애호가들의 천국이라는 필리핀에서 꼭 가봐야 할 곳들을 열심히 찾아 종합 리스트까지 만들어 왔다. 그런데 이게 웬걸. 놀러는커녕 필리핀에 도착한 그날부터 또 다른 24시간 대기조가 되어 매시간 일기예보와 재난 사이트를 확인하며 마음 졸이고 있다.

 필리핀은 전 세계에서 태풍·지진·화산분화 등 자연재해가 가장 빈번한 나라 중 세 번째다. 게다가 지금이 한 해 20여 차례 겪는 태풍과 홍수가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계절이기 때문에 크고 작은 재난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지난달만 해도 태풍 풍웡이 필리핀 북부를 강타해 약 50여만 명의 이재민이 났는데 바로 그때 필리핀 중부에서는 마욘 화산이 분화 조짐을 보이면서 화산 지역 주민 5만여 명이 인근 학교로 분산 대피하고 있었다.

 구호팀장인 나 또한 이 현장, 저 현장으로 단 하루도 쉬는 날 없이 눈썹을 휘날리며 다니는 중이다. 이번 주에는 폭발 직전인 마욘 화산 현장에서 지역정부와 협력해 이재민들에게 물과 비상식량 등을 지원 중이지만, 대형 태풍이 필리핀 북부를 향했다는 예보가 있어 다음 주에는 어느 곳으로 달려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솔직히 이렇게 숨 쉴 틈 없이 일하다 보면 이 일이 가슴을 뛰게 한다는 나도 지친다. 요 며칠 동안 사람들을 사무적으로 대하고 잘 웃지도 않고 목소리가 더 높아진 것을 보면 지친 게 분명하다. 아, 단 하루만이라도 북적대는 현장과 팀 숙소를 떠나, 매일 보는 얼굴들과 일을 떠나 조용한 데로 갔으면 좋겠다. 한국이라면 한나절 북한산을 걷고 내려와 산 밑에서 사우나 하고 프라이드치킨에 맥주 한잔 쭉 들이켜고 나면 말끔히 풀릴 텐데…. 친구들이 올가을 한국 산이 특별히 환상적이라며 다투어 사진을 보낼 때마다 반갑고도 부럽다. 그리고 한국 산이 몸서리치게 그리워진다.

 재난 현장에서 잘 지내려면 지금처럼 힘들고 지칠 때마다 스스로를 북돋워주고 위로해 주고 힘을 주는 자기만의 방법이 필요하다. 나 역시 이럴 때마다 등판하는 나만의 구원투수가 있다. 일상의 사소한 습관이 가져다 주는 소소한 행복이다. 길게는 30년도 넘었지만 마치 무거운 배낭을 메고 힘겹게 산길을 걷다 만나는 작고 예쁜 야생화처럼 매번 놀라운 기쁨과 힘을 주곤 한다. 오늘은 그 비결 중 세 가지만 공개해 볼까 한다.

 첫째 비결은 아침에 눈 뜨자마자 마시는 밀크커피. 뜨겁게 데운 우유 한 컵에 가루 커피 2스푼, 설탕 반 스푼을 넣어 마시는데 매일 아침 이 달콤한 커피가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한 모금씩 식도로 내려가는 동안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20대 초반 한창 겨울 야영을 다닐 때 생겼으니 30년도 넘은 습관이다. 한겨울 산속에서 변변치 않은 장비로 야영하려면 너무 추워 밤새 한잠도 못 자기 일쑤. 그런 다음 날 새벽에 마시는 가루우유 듬뿍 넣은 뜨거운 밀크커피는 꽁꽁 언 몸과 마음을 녹여주는 구세주였다. 그 맛과 멋을 못 잊어 아침마다 그때를 재현하며 마시다 보니 어느덧 내 작은 행복의 비결이 되었다.

 둘째는 와인 한 잔. 이 습관도 10년은 넘었는데 혈전이 잘 생기는 체질이라 혈액순환에 좋다는 의사의 권고로 마시기 시작했다. 이런 의학적 용도라면 고급 와인이 전혀 필요 없다. 한국에서는 1만원 남짓, 필리핀에서는 5000원 가격의 와인이면 충분하다. 매일 저녁 자기 직전 넉넉히 따라 딱 한 잔 마시며 일기를 쓰는데 그때마다 하루를 잘 마감하고 있다는 만족감과 행복감이 몰려온다. 덕분에 일기를 자세히 쓰게 되는데 그 일기가 쌓이고 넘치면 한 권의 책이 되어 나온다. 다음 책도 내년 초에 나올 예정이다.

 셋째는 시 읽기. 매일 아침 한 편의 시를 큰 소리로 읽는다. 시 읽는 습관은 35년 이상 묵은 비결이다. 요즘에는 신문이건 지하철 안이건 시를 흔히 접할 수 있어 다음날 외우고 싶은 시를 미리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 습관은 여고 시절 친구들과 누가 시를 더 많이 외우나 내기를 했는데, 뒤질세라 아침마다 전날 외운 시를 연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졸업 후에는 내가 말이 빠르니 적어도 발음은 정확히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시를 또박또박 읽었는데 효과 만점이었다. 오랜 세월 이러다 보니 외우는 시가 일상언어와 내 글 중에 자연스레 스며들게 되어 금상첨화다.

 어찌 구호현장뿐이랴. 누구라도 잘 살펴보면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서도 자신을 지탱하고 힘을 주는 소소한 행복의 비결이 분명 있을 것이다. 너무 작고 소박해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 작은 것들을 찾아내고 누리는 것이 바로 비결 중에 비결일 거다. 놀랍지 않은가? 어떤 이에게는 밀크커피 한 잔과 시 한 편이 태풍과 활화산만큼 힘이 세다는 사실이.

한비야 유엔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