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꽃의 유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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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유혹/샤먼 앱트 러셀 지음, 석기용 옮김/이제이북스, 1만원

해바라기는 태양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상징이다. 노란색으로 꿈틀거리는 그의 해바라기는 알고 보니 엄밀한 수학적인 구조를 갖고 있었다.

해바라기는 소용돌이 모양을 한 21개, 34개, 55개, 89개, 144개의 씨로 이루어져 있는데, 계산해 보니 각각의 수는 앞선 두 수의 합이다. 사람들 마음에 와 안기는 정서적 환기(喚起)효과 뒤에는 이런 '아름다움의 물리학'구조가 정교하게 숨겨져 있었다.

◇아름다움에 숨겨진 물리학='꽃의 유혹'이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자연과학 정보의 일부인데, 이런 아름다움의 패턴은 지구의 25만종 이상의 꽃 어디에서도 나타난다.

한 송이 꽃이 지닌 '아름다움의 물리학'의 정보는 이토록 생경하기도 하고 동시에 신선하게 다가온다. 때문에 '아름다움의 물리학'과 미학을 접목해 '꽃의 유혹'을 쓴 미국의 과학저술가 샤먼 앱트 러셀의 책은 읽는 이에게 '신개념 꽃 이야기'다.

미 캘리포니아대에서 자연 보존학을 공부한 뒤 몬태나대에서 글쓰기를 함께 공부한 러셀에게 쏟아진 찬사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낱말들을 노래로 만드는 그는 생물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적이며, 때로는 영적(靈的)인 느낌의 글을 쓴다."

시인들의 전통적인 영탄조 목소리와 달리 과학 칼럼니스트가 부르는 아름다움의 노래인 '꽃의 유혹'은 이 신록의 계절, 꽃들의 계절에 음미하듯 읽어볼 향기로운 산문이다.

◇꽃들에게 노래를=꽃은 꼭 사람을 닮았다. 질투하고 사랑하며, 계산하고 다툰다.러셀은 그런 꽃들이 '민감한 촉각의 소유자'라고 귀띔해 준다.

해바라기는 뿌리를 이용해 주변 토양의 맛을 음미하며 영양소를 찾아 나서는데 땅 속 2.4m까지 파고든다. 열대성 덩굴식물은 오목한 꽃잎을 이용해 음파를 발사하는데 박쥐가 꽃을 향해 외치면 꽃은 화답을 한다.

시계꽃은 모자 위에 익살스럽게 헬리콥터의 회전 날개를 달아놓은 듯한 모양이라 나비나 벌이 어느 쪽에 착륙하건 그대로 꽃의 중심부로 걸어가면 그뿐이기에 벌레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썩 민주적인 셈이다.

◇'꽃들의 섹스' 꽃가루받이=러셀이 가장 공들여 관찰하고 묘사한 부분은 꽃들의 섹스인 수분(受粉.꽃가루받이)이다.

벌레나 동물들이 자신이 뿜어낸 꽃가루를 옮겨주도록 만들기 위해 꽃은 체온을 바꾸고, 냄새를 피우고, 변장도 한다고 들려준다.

꽃가루는 때로 성적인 자극을 일으키고, 꽃가루받이를 위한 섹스 파트너를 찾기 위해 암수 성전환을 수시로 한다. 영국의 과학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애튼보로가 표현했듯 식물에도 '사생활'이 있는 것이다.

막연하게 끌려 꽃에 대해 알게 될수록 꽃들의 침묵은 사라지고, 아름다움의 물리학을 탐구하는 일은 흥미진진한 여행으로 접어든다. 이 여행을 이끄는 도우미인 러셀은 타고난 자연 예찬론자이자 과학자며 시인이다.

"붓꽃에 있는 노란색 줄무늬는 작은 항공기(곤충)들의 착륙을 유도하는 가설 활주로"고, "나비를 유혹하는 야생화의 색깔은 광고"다. 먹이와 향기와 섹스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작가의 묘사는 멜로 소설의 한 대목을 연상시킨다.

"지중해 난초는 금속성의 청보랏빛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올록볼록한 입술을 갖고 있다…난초는 백만 개 이상의 씨앗을 만들고 나서야 마침내 만족한다. 팬지꽃은 여인의 음부처럼 생긴 얼굴을 하늘에 바짝 쳐들고 한껏 기대에 부푼 채 기다린다."

◇꽃들의 군비경쟁='꽃들의 섹스'를 설명하던 작가는 "한가로이 정원을 가로질러 거닐다 보면 민망해 몸 둘 바를 모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고 짐짓 시치미를 뗀다.

시간에 따라 성적 역할을 분리하는 제비고깔를 보라. 또 자신의 성을 선택하는 능력을 지닌 은매화도 그렇다.수컷 벌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암컷 벌의 모습을 닮는 유럽산 난초 역시 도무지 구애행위에 거리낌이 없다.

꽃들이 꽃가루받이를 위해 곤충들과 벌이는 행위는 러셀 말로는 행복한 결혼 관계라기보다 군비 경쟁에 좀더 가깝다. 식물들은 운명을 걸고서 꽃을 피운다.

세상의 모든 꽃은 공룡시대를 기억하는 생명체의 후손들이다. 5억년 전 캄브리아기를 포함해 여섯 번의 대규모 절멸을 겪어온 지구는 이제 일곱번째 절멸을 앞두고 꽃이 인간의 희망임을 안다.

러셀은 "우리에게는 꽃의 치료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들꽃이 만발한 들판에 벌거벗고 꽃가루의 행로를 따라 걸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방에 만발한 꽃들 사이로"라며 꽃에 바치는 헌사를 매듭지었다.

한편 좋은 번역에 힘입어 책 자체가 이미 한 송이의 꽃인 러셀은 마운틴 앤드 플레인 북셀러상(1992년)을 비롯해 논픽션작가에 주는 헬리조지츠 잭슨상 등을 받았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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