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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가 만난 사람] 큰 문제 옮겨 놓고 작은 신뢰부터 쌓자는 게 대통령 생각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지난 24일 서울 창성동 정부종합청사 별관에 위치한 통일준비위원회 집무실에서 정종욱 부위원장이 ‘통일 청사진’ 구상 등 통준위의 활동 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춘식 기자

남북관계를 이대로 방치하면 매우 어려운 상황에 빠져들고, 핵무기 개발을 그치지 않는 북한과 분단 고착화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는 게 정종욱 통일준비위원회 민간 부위원장의 지론이다. 그런 상황 인식을 바탕으로 그는 전향적인 대북 접근을 제안했다. 북한 비핵화 원칙을 철통같이 견지하면서도 대화와 교류의 길을 터보자는 것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관은 뭔가.
“과거 정부의 대북정책과는 전혀 다른 전제에서 출발한다. 흡수통일이라든지 북한의 몰락을 전제하고 있지 않다. 대신 남북이 대화하고 교류해서 함께 평화통일을 추구한다는 게 대통령의 통일관으로 안다. 북은 대화와 협력의 대상일 뿐 아니라 통일의 동반자라는 생각이다. 이를 위해선 남북 간 당국자 회담이 중요하고 궁극적으로 남북관계에 도움이 된다면 정상회담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대통령은 여러 번 피력했다. 사실 박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2002년 5월) 북한 최고지도자(김정일)와 만난 유일한 인물 아닌가.”

현 상태선 남북 현안 일괄 타결 어려워
-하지만 집권 1년 반 동안 북한과 대화다운 대화가 없었다.
“박 대통령은 2년 전만 해도 ‘밥상론’을 폈다. 이것저것 다 차려놓고 먹는 한식 밥상처럼 남북이 여러 현안을 일괄 타결하자는 구상이다. 그러나 지금은 남북 간에 워낙 신뢰가 없어 일괄타결이 어렵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따라서 조그만 합의들을 축적해 신뢰를 쌓아가는 방식을 구상하는 듯하다. 일례로 박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민생·문화·환경통로를 제안했다. 실용적 분야에서 남북이 합의할 수 있는 조치들이다. 이런 게 하나씩 실현되면 고위급에서 합의를 이뤄낼 수 있다는 거다.”

-박 대통령이 25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북핵은 심각한 위협”이라고 비판한 건 어떻게 봐야 하나.
“그동안 정부가 얘기해온 수준과 같은 언급이다. 핵 문제가 안 풀리면 대화 안 하겠다는 얘기가 아니다. 핵 문제가 안 풀려도 인도적 지원이나 환경·민생 같은 소분야 협력은 할 수 있다는 거다. 그렇게 신뢰를 쌓아가다 보면 핵 문제도 풀릴 수 있다는 게 (박 대통령 대북정책의) 핵심이다.”

-유엔 연설에서 북한 인권에도 우려를 표시했는데.
“인권을 비켜가긴 어렵다. 국제사회의 보편적 이슈 아닌가. 유엔이 북한 인권을 계속 압박하니 북한도 인권보고서를 내는 등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나.”

-3년 반 남은 임기 내에 대화를 진척시키려면 인권을 거론하지 않는 게 방법이란 지적도 있다.
“그런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통일은 중장기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내년이 대단히 중요한 시기라고 본다. 북한은 그 기회를 잡기 위해 빨리 대화에 나서야 한다.”

-내년이 중요한 시기인 이유는.
“분단 70주년이다. 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남북이 공동 주최하는 문화축제를 제안했다. 이걸 계기로 통일준비위원회는 내년 8·15를 전후해 남북이 공동으로 다양한 문화행사를 여는 방안을 통일부·문체부 등과 기획 중이다.”

-남북 공동축제엔 경평(京平)축구도 포함되나.
“물론이다. 그런 행사를 통해 국제사회에 남북이 단합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 또 내년이 중요한 이유는 북한 내부 사정 때문이다. 4~5년 전부터 시장이 크게 확대되고 있다. 중국도 자신들이 개방을 개시한 1970년대 말~80년대 초의 모습을 북한에 요구하고 있다. 북한이 거부한다면 북·중관계는 더욱 경색될 거다. 그래서 북한은 외자를 갈구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에 돈을 줄 나라는 한국뿐이다. 북한이 우리가 제의한 2차 고위급회담에 나와 성의를 보인다면 5·24 제재 해제와 금강산 관광 재개가 가능해진다. 그러니 북한은 빨리 회담장에 나와야 한다.”

5.24 조치, 이미 미세조정 들어가
-성의를 보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가.
“천안함 폭침에 대해 북한은 과거에 에둘러서 사과 비슷한 의사를 표명할 뜻을 비춘 바 있다. 금강산 관광객 사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사과 비슷한 의사를 표시한 게 있다. 이번 회담에 나와 그같이 한다면 우리도 전향적 조치를 할 준비가 돼 있는 걸로 안다.”

-북한의 거부로 5·24 해제가 불발돼도 내년에 남북 공동행사를 할 수 있나.
“남북관계는 항상 뭐든지 가능하다. 이미 5·24 조치는 미세조정에 들어갔다. 나진·하산 프로젝트는 우리 기업이 러시아 지분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5·24 조치를 우회해 북한과 교류하고 있는 셈 아닌가. 이명박 정부 때 남북관계가 경색된 가장 큰 이유가 ‘비핵 개방 3000’이었다. 핵 문제를 맨 앞에 두니 대화가 안 된 거다. 그러나 현 정부는 핵 문제를 조금 들어다가 (옆에) 놓고 북한과 대화 통로를 열려는 점에서 다르다. 박 대통령은 ‘핵 문제와 별도로 대북 인도적 지원은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혀 왔다. 북한 산모·영유아들을 지원하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통준위에서도 앞으로 남북대화가 본격화되면 산림녹화, 철도 연결, 개성공단 확대, IT 투자 등 여러 카드를 준비 중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남재준 전 국정원장은 ‘2015년 김정은 정권 붕괴설’을 주장했다.
“정부의 대북관엔 대통령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 박 대통령은 흡수통일을 생각하지 않는 걸로 본다. 우리에게 엄청난 부담이 되고 국제적으로도 아주 복잡한 문제를 낳기 때문이다. 중국은 물론 러시아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남북이 교류·협력해 공동 발전해가다가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합의를 통해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박 대통령은) 생각하는 걸로 안다. 남북을 막론하고 과거의 타성에 젖어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 사람들은 (박 대통령의 통일관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길밖에 없다고 본다. 박 대통령은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서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북한과 연루된 재일교포 문세광의 흉탄에 목숨을 잃은 사건을 두고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남북 간에 평화통일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본인이 직접 겪은 비극을 바탕으로 얻은 통일관이라 책을 읽고 형성한 철학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런 게 박 대통령이 통준위를 출범시킨 배경이다.”

-통준위는 지난달 7일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 주재로 1차 회의를 열었다. 무슨 말이 오갔나.
“일부 위원이 ‘북한이 흡수통일이란 말에 반발이 심하니 대통령이 흡수통일을 하지 않겠다고 직접 밝혀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흡수통일 하지 않겠다는 얘기를 할 순 없지 않나. 대신 우리는 북한의 급변사태를 전제로 한 통일이 아니라, 평화통일을 추구한다’는 선으로 답변하더라. 대단히 심오한 뜻이 있다고 본다. 또 통준위에 참여한 우윤근 새정치민주연합 정책위원장은 박 대통령에게 5·24 조치 해제와 금강산 관광 재개를 건의했다. 박 대통령은 직접 답하지 않는 대신 ‘남북관계란 게 항상 상대가 있기에 대통령이 이런 문제에 즉답을 하기란 매우 위험스러운 일’이라며 ‘우리는 북한을 평화통일의 동반자로 간주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대통령이 ‘흡수통일 안 하겠다는 말을 할 순 없지 않나’고 한 건 무슨 뜻인가.
“고심의 결과 아니겠나. 우리 내부엔 엄청난 숫자의 보수층이 있다. 그들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 아닐까.”

-보수층을 자극할까봐 그렇게 말했지만, 진짜 방점은 평화통일에 있다는 건가.
“그렇다. 대통령도 흡수통일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걸 분명히 이해하고 있을 거다.”

대북 정책서 북핵 비중 작아지게 해야
- 그러면 북핵은 어떻게 할 건가.
“이 문제에 대해선 내가 대통령의 생각을 대변하는 입장이 아니다. 통준위 차원에서만 얘기한다면 북한은 핵을 스스로 포기하기 힘들다고 본다. 그러니 북한 정책에서 핵의 비중이 점점 작아지는 상황을 우리가 유도하는 데 초점을 둬야 한다. 지금은 북한이 전적으로 핵에 안보를 의존하고 있지만 경제가 성장하면 자신감이 커지고 핵에 대한 의존도가 줄 거다. 그러면 핵 문제에 유연한 자세를 갖게 되지 않을까.”

- 그런 논리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비슷한 것 같다.
“큰 차이가 있다. 그때는 대화 전에 물밑 흥정을 했다. 북한이 ‘남측 제안을 받아줄 테니 얼마를 달라’고 요구하고, 이를 들어줘야 대화에 나오는 식이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밀실거래는 안 한다는 입장이 확고하다. 또 다른 차이는 그때에 비해 북한의 핵능력이 엄청나게 커졌다는 점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만 해도 북한 핵은 국제사회의 주목조차 받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핵무기를 갖는 단계까지 왔다. 자연히 핵 문제 해결엔 긴 시간이 걸릴 텐데 무조건 기다리기만 해선 안 된다는 판단도 작용한 거다. 물론 6자회담 등을 통해 핵폐기 노력은 계속해야 한다.”

-북한이 4차 핵실험을 해도 인도적 지원을 계속할 것인가.
“원칙적으로는 (핵실험을 한다고 인도적 지원이) 바로 동결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핵실험은 워낙 심각한 도발이니 인도적 지원 지속 여부는 부차적 문제다. 핵실험은 안 하는 게 가장 좋다.”

- 그밖에 통준위에서 준비 중인 것은.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남북관계가 진전되고 어느 단계에까지 이르면 종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꿀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것이다. 먼 미래의 일일 테긴 하지만, 북·미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북한이 워싱턴에 대사관을 둘 가능성도 있다. 이런 평화협정에 대한 구상이 우리가 준비 중인 로드맵의 한가운데 들어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통준위에서도 하영선 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 주도로 ‘신평화체제’란 TF를 가동 중이다.”

-신평화체제에서도 한·미동맹은 유지되나.
“한반도 안보에 취약점이 존재하는 한 한·미동맹은 물론 존속해야 한다”

-평화협정 얘기만 나오면 ‘주한미군 철수하라는 주장’이라는 반발이 나오는데.
“여러 전문가들이 (그 문제에 대한 답을) 검토할 것이다.”

-통준위에 대해 대통령이 주문한 게 있나.
“통일에 대한 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해주고, 구체적인 통일정책과 민관 협력 구조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통준위는 이를 위해 내년 8월에 통일 헌장과 방안 및 로드맵으로 구성된 ‘통일 청사진’을 제시할 계획이다. 이념을 초월해 국민적 합의로 만들 거다. 122개 단체들로 자문단을 구성했다. 진보단체도 여럿 포함시켰다. 통일에 대해선 보수와 진보 간에 의견 차가 크지 않나. 통일 청사진 논의 과정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전개될 거다. 고함치는 사람도 나오지 않겠나. 그런 과정을 겪어야 한다.”

온라인 중앙일보·강찬호 기자 stoncol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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