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나무는 젊은 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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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허혜정(1966~ ), '나무는 젊은 여자'

1

봄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차갑게 젖어있는 가지와 진흙 묻은 뿌리들

아무런 봉오리도 돋아오르지 않은

회색빛 정경 속에

저 나무는 젊은 여자처럼 서 있다

점화의 순간을 기다리는 폭탄처럼

동심원의 빗장을 가슴에 단단히 지르고

너는 뿌리요 하늘을 향해

손 뻗친 가지요 무모한 갈망을 잡아당기면서

널 키우는 힘이요, 스스로의 발부리를 잡고 있는

족쇄요 분수를 꿈꾸는 수도꼭지요

그래. 침묵하는 동안에도

우린 노래부르고 있지. 때가 되면

세포가 갈라지지. 더 빨리빨리 쪼개지지

천 개의 눈알을 폭발시키지

내 세포들은 성난 폭도

공기와 빛의 부드러운 약탈을 나는 꿈꾸고 있다

폭음도 없이 비릿한 선혈을 토해내는

저 아름다운 폭탄처럼

2

싱싱한 활엽수처럼

잔뜩 햇빛을 받고 커오르길 원했다

그러나 지금은 키 작은 침엽수였으면 한다

올올이 상처로 찢겨버린 잎사귀, 바람과 싸우면서

그늘 속에서 자라는 나무

식민지의 군대처럼

완강히 제자리를 사수하는 나무

힘찬 아리아를 연습하는 가수처럼 중얼대며

더 바짝 마른 산등성이에 누워 있는

그러나 힘차게 허리를 튕겨올리면

얼마나 미끈하게 자랐는지 아무도 모르지

비틀비틀 변두리로 유배되어가면서도

끝내 제 질긴 섬유질의 근성을 포기하지 않는 나무

이왕이면 자리를 깔고 앉는 공원이 아니라

아찔하도록 위태로운 절벽에 뿌리박고 싶다

물론 그 밑에는 내 발가락까지 깨끗이 염습해줄 바다가

쓰리도록 차갑게 출렁이고 있어야겠지



그대를 향해 나의 봄은 달려가는데. 그대는 아직도 가을, 홀로 누운 겨울 밤, 혼자만의 여행을 꿈꾸는 장마. 너무 뜨거운 여름. 폭탄처럼 터지는 위험한 꽃. 오늘도 나는 그대를 향해 달려가다 넘어지는 이른 봄. 과속으로 달려가는 어지러운 봄.

박상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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