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임마누엘 칼럼

100년을 내다보고 자치제 계획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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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2007년 한국에 발을 디뎠을 때 지방정부의 제도개혁 능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충남 도지사 보좌관으로 일하는 동안 도청 소재지를 대전에서 홍성으로 이전하는 데 따른 갖가지 준비사항들에 참여하게 됐다. 한국에선 도시 인구가 100만 명에 이르면 시가 광역시로 바뀌기 때문에 도청 소재지를 홍성으로 옮기면서다.

 이런 정책은 매우 과학적이고 실용적이지만 이 같은 혁신은 미국에선 거의 불가능하다. 뉴욕이나 LA 같은 대도시의 인구는 다른 주들보다 훨씬 더 많지만 주정부에 걸맞은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지난 반세기 동안 새로운 주를 만들어내기도 쉽지 않았다. 푸에르토리코 같은 자치령을 주로 승격시키는 문제도 워낙 오래 끌어 이젠 아예 독립시키자는 논의가 대두될 정도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도청 소재지 이전에서 보인 놀랍고 신속한 혁신에도 불구하고 지방정부의 행태에서 드러나는 약점도 무시하기 어렵다. 도시 설계 시 나타나는 근시안적 태도와 확고한 제도적 틀의 결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정부 관리들은 자신이 사는 도시의 과거 훌륭한 운영 선례를 모를 뿐만 아니라 제아무리 혁신적인 정책도 사전에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부족한 듯하다. 그저 온갖 양식의 서류를 채우기에 급급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충남도청, 대전, 서울에서 함께 일한 공무원들은 교육 수준도 높고 사려 깊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1년만 지나면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나는 순환근무제의 틀에 갇혀 있다. 이들이 지적 능력과 굳은 의지에도 불구하고 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구축하기 힘든 이유다. 이들에게 시간을 내 자신의 일과 관련된 서적을 읽어보라고 하면 아마 사치스러운 주문일지 모르겠다.

 게다가 각 정부 단위의 평가에 이용되는 기준도 장기적이고 체계적이기보다는 단기적으로 구체적인 결과물을 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정부의 업적은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제대로 된 평가가 가능하며 여기에는 역사적 안목을 갖고 있는 전문가와 시민들의 반응도 요구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서울시는 시정에 시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수렴하기 위해 ‘위키 서울’ 등 다양한 혁신 방법을 시도하며 도시의 녹색공간을 늘리기 위한 캠페인에 나섰다. 그러나 공무원들이 장기적인 목표를 추구할 시간과 동기부여가 없다면 이 또한 공염불이 될지 모른다.

 한국의 지방정부는 단기적 시각에서 장기적 관점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절실하다. 정책 아이디어가 제아무리 신선하고 좋아도 정권교체와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실행되기 어렵다면 유명무실한 정책이 될 수밖에 없다. .

 그러나 장기 계획이 수립된다면 서울시청 공무원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쌓을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새로운 분야의 전문가들을 미리 기를 수 있다. 아무리 후한 급여를 주더라도 하루아침에 전문가를 구할 수는 없지만 사전에 계획만 세운다면 충분히 완벽한 팀을 만들 수 있다.

 이 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줄 행정적 지혜는 조선왕조의 통치 방식에서 찾으면 어떨까 싶다. 정도전이 경국대전에서 구축한 조선의 통치이념은 그 후 500년을 지탱하지 않았나. 서울시도 개발과 유지, 관리에 최소 100년을 내다본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런 도시계획안에 40년 후에 대해 세세한 부분을 자세하게 설명하긴 어렵겠지만 장기적 안목으로 접근한다면 서울의 인프라시설 상태와 시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상당 부분 예측할 수 있다. 사실 혁신은 한 발짝 물러서 장기적 시각에서 도시 공간의 개발을 바라볼 때만 가시화된다.

 100년을 내다보고 도시계획을 수립한다면 잘못 지은 건물과 도로에 수반되는 숨은 비용도 고스란히 드러나게 된다. 그게 바로 100년이 지나도 끄떡없는 양질의 자재를 쓰고, 시공을 해야 하는 이유다. 당장은 시간이 걸려도 제대로 지은 하수도 시설과 보도가 결과적으로 더 싸게 먹힌다. 그렇게 되면 최소 20년간은 거뜬한 가로등과 100년간은 거뜬한 주택을 짓게 되리라.

 장기적인 도시계획이 수립된다면 단기적 이득을 노린 정치인들의 포퓰리즘적 행태도 점차 사라질 것이다. 그런 정책이 미래에 가져올 해악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장기적 계획이 장기적 재정정책의 뒷받침을 받아야 할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만일 20, 30년간 지속될 프로젝트를 위한 장기적 금융조달 방식을 개발한다면, 주택의 단열처리와 태양전지판 이용도 더 싼 값에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이 같은 재정조달 계획은 경제에 지속적으로 활력을 불어넣을뿐더러 단기 이익을 노린 투기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통치 시스템은 장기적 계획에 확고히 바탕을 뒀다. 그 지혜를 오늘날의 서울과 지방정부에 끌어온다면 분명 한국이 전 세계에서 행정의 선두주자로 우뚝 설 것이다.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