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北核 새 외교카드 개발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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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북핵 문제에 관한 베이징 3자회담이 시작됐다. 비록 한국은 북한의 반대로 배제됐지만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 테이블로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온세계의 주목을 끌기에 족하다.

이라크전 승리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미국이 이번에 중국의 도움을 받아 북한의 북.미회담 요구에 사실상 응한 이유는 북한이 미국의 선 핵포기 요구에 협조할 용의가 있는지를 탐색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북한에는 재처리 동결, 장거리 미사일 실험 유예 등 이른바 금지선(red line)을 넘지 않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대가를 얻어낼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가 될 가능성이 크다.

*** 햇볕정책에 볼모 된 외교당국

문제는 이 과정에서 우리 외교의 역할과 위상은 무엇인가에 있다. 지난 5년간 우리 정부가 추구한 햇볕정책은 남북한 평화공존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지 목적은 아니었다.

남북한 간 적대관계를 화해관계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에 진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햇볕정책이 성급히 추진되는 과정에서 북한 지도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아야 햇볕정책에 진전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오산 때문에 대북 관계에서도 그렇고 국제적인 쌍무관계나 다자관계에 있어서도 실리(實利)외교보다 실리를 놓치는 실리(失利)외교가 돼버린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북한 핵문제는 대량살상무기 비확산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정치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나 분명히 국제적인 이슈다.

인도와 파키스탄 핵실험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북한의 NPT 당사자 여부와는 무관하게 북핵 문제는 유엔과 안보리가 당연히 다룰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북한의 핵보유 저지의 당위성에 대해선 5개 상임이사국을 포함한 국제사회 전체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으므로 유엔 다자무대를 우리 국익에 맞게 잘 조절하면 외교적으로 활용할 소지가 얼마든지 있었음에도 우리 정부는 햇볕정책에 볼모가 돼 이를 활용하기를 주저했던 것은 그 한 예라 할 수 있다.

북핵 문제의 또 다른 결정적인 측면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남북 문제라는 점이다.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와 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근본적으로 남북간 평화공존의 기본 틀을 마련했다는 데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런데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제조 시도나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 시도는 모두가 비핵화 선언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위다. 이는 남북 평화공존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다.

그렇다면 우리로서는 북한이 비핵화 선언의 백지화라는 남북간의 금지선을 넘을 경우에 대비해 북한과 국제사회를 대상으로 한 치밀한 정치적.법적.외교적 대응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반도 비핵화는 주변 4강과 국제사회의 첨예한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인 만큼 한반도 비핵화를 북한이 위협하면 할수록 이에 대응하는 우리의 외교적 행동 반경은 넓어지는 것이므로 이 기회에 우리의 잠재적 외교 카드를 적극 개발하고 이를 북한과 주변 4강 및 국제사회를 향한 외교 카드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 北의 남측 배제 대응책은 있나

이번 베이징 3자회담의 결과에 따라 한국도 협상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을지가 드러날 것이다. 94년 제네바 합의 이래 핵문제에 관한 한 미국만을 상대하겠다는 노선을 사실상 관철해 온 북한이 끝내 한국의 참여에 반대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회담은 진행되나 한국은 계속 배제되거나 설사 4자, 6자회담으로 발전돼 참여는 하더라도 실제 협상은 막후에서 북.미 간에 이뤄질 상황도 충분히 상정된다.

94년 당시 중간선거를 눈앞에 둔 클린턴 행정부가 서둘러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 냈듯이 대통령 선거를 얼마 앞둔 부시 행정부도 국내의 정치적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또다시 우리가 협상 과정에서 소외되고 결과적으로 우리 실익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 결과가 베이징 회담에서 재연되지 않게 하려면 한국의 참여를 불가피하게 하는 상황을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내야 한다.

한반도 문제 해결 과정에서 우리의 역할과 발언권을 확보하는 슬기로운 외교가 절실히 요구되는 때다.

李時榮(전 외무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