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이공계 푸대접 땐 10년 후 기약못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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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는 높지만 정작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괄시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과학자가 되겠다는 청소년들의 꿈을 꺾어선 안됩니다."

1997년 간암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났던 한만청(韓萬靑.70) 전 서울대병원장.

2001년 10월 '암과 싸우지 말고 친구가 돼라'는 책을 통해 이른바 '유쾌한 암 치료론'을 펼쳐 화제를 모았던 그가 이번엔 이공계 살리기에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가 이를 위해 동원한 방법은 다름 아닌 만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만화가 과학기술과 이공계 분야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효과적인 홍보수단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11일 '과학기술의 대중화'라는 기치 아래 사단법인 '국민경제과학만화운동본부'를 출범시키고 이사장을 맡았다. 그리고 첫 작품으로 만화책 '이공계가 짱'을 내놓았다. '짱'은 청소년들이 '최고'라는 의미로 쓰는 속어다.

이 책은 고등학교 1학년인 주인공 '예지순'이 인문계와 자연계 사이에서 갈등을 겪다가 과학자가 되기 위해 결국 자연계를 선택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운동본부 측은 '이공계가 짱'이라는 제목으로 두세 권의 속편을 낼 계획이다.

"이공계에 대한 푸대접으로 우리나라의 앞날이 걱정된다고 말하는 이들은 많지만 아무도 이를 개선하려는 구체적인 실천을 안 해 이렇게 나서게 됐습니다. 실제 기업.정부.연구소 등에는 이공계 출신이 마땅히 차지해야 할 자리에 비이공계 출신 인사가 앉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학부모들도 자녀에게 이공계 진학을 권하지 않죠. 중국의 경우 공산당 정치국원과 장관의 90% 가량이 이공계 출신입니다."

그는 특히 "기초과학을 경시하면 5~10년 후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며 "이공계 출신에게 정당한 사회적.경제적 대우를 해주는 게 이공계 기피현상을 해결하는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40여년간 의사 생활을 했던 그가 이공계 지킴이로 나선 데 대해 의외라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韓이사장의 발자취를 보면 그가 과학기술 분야에 쏟는 애정이 이해가 된다.

"어린시절 공대에 진학해 과학자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국어.영어 등 문과 계통의 과목보다 수학.물리 등의 과목을 더 좋아했어요. 하지만 가족의 권유로 의대에 진학했죠. 입학 후 공학에 대한 향수와 미련을 버리지 못해 공학과 관련이 깊은 진단방사선과를 전공했습니다."

특히 맏형인 한만춘(韓萬春) 전 연세대 이공대학장이 85년 63세로 세상을 떠난 뒤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고 한다.

고인은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1회 졸업생으로 국내 전기공학 분야에서 존경받는 1세대 과학자였다. 韓이사장은 형이 생전에 못다 이룬 과학기술 발전에 자신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는 뜻을 간직해 왔다고 한다.

대한의용생체공학회 회장을 지낸 韓이사장은 방사선과학과 공학을 접목시켜 영상진단의 새로운 분야인 '대한팩스(PACS)학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또 94~95년 산학연협동연구소 이사장을 맡아 기업.대학.연구소의 협력을 지원했고, 2001년부터는 산학연종합센터가 개설한 교육프로그램 '산학정(産學政) 정책과정'.'산학연CEO과정' 의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韓이사장은 현재 자신의 삶은 '암이 준 선물'이라고 말한다. 투병이라는 시련이 없었다면 가족의 소중함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혼자 잘난 맛에 살았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는 건강을 지키는 방법으로 ▶과로하지 않기▶규칙적이고 균형있는 식사▶분수에 맞는 운동▶청결한 환경 등을 꼽았다.

특히 전세계를 공포에 떨게 하고 있는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SARS)과 관련, 외출한 뒤나 화장실에 다녀오면 반드시 손을 씻을 것을 권했다. 병균의 침입을 막고 몸의 저항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개인 위생에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재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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