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0)제75화 패션 50년(3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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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63년 가을은 우리나라에서 디자이너들에 의한 기성복이 처음 선보인 시기다.
국가경제나 개인 살림이 유복한 구미에서는 보편화 된 기성복이 경제적으로 뒤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외면 당하고 마춤이라야만 행세를 할 수 있는 것은 뭔가 크게 잘못돼 있다는 것이 복식계에서도 뜻있는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물론 이런 잘못된 현실은 체면치레로만 흐르려는 일부 사치한 여성들의 의식구조 탓도 있었지만 막상 기성복을 사 입으려 해도 믿고 살만한 상품이 없다는데도 원인이 있었다.
그때까지 시장이나 양품점 등에서 취급하는 기성복들은 디자인이나 빛깔 등이 유치하거나 겉보기는 괜찮아도 한번 빨면 물이 빠지고 솔기가 삐져나오는등 옷감의 질이나 바느질 따위를 믿을수 없는 저질품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자연 소비자들은 시장에 나가 옷감을 끊어다가 양장점에 가지고 가서 디자인을 고르고 치수를 재고 며칠 후 다시 가서 가봉을 한 후 나중에 찾아 입는 거추장스런 3단계 과정을 싫어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대한 복식 디자이너협회 회원들은 이제 우리나라도 대중을 위한 기성복과 일부 특수층을 위한 고급맞춤복이 구별되어야 할 시기라는데 의견을 모으고 한국의 기성복 시대를 출범시키는데 앞장 설 것을 다짐했다.
그래서 63년 10월 미도파백화점 3층에 협회직영 상설서비스센터를 마련하고 회원들인 몇몇 중진 디가이너들이 직접 제작한 기성복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때 참가한 사람들은 서수연(아리사) 한희수(보오그) 최금인(라모드)씨와 나(국제)등으로 공동매장에서 연속으로 전시 판매를 하기 시작했는데 본격 기성복으로는 한국 최초가 아니었다.
옷이란 본래 입어서 편하고 보기 좋으면 되는 것. 특수한 체격이나 특별한 환경이 아니면 기성복 중에서 각자 취향대로 의생활을 즐길 수 있다.
기성복은 윈칙적으로 대량생산이 생명이고 그래야만 생산 가격을 낮출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당시 양장업계 실정으로는 지금처럼 전국규모의 대량생산은 엄두도 낼 수 없었고 부분적인 판로개척에 겨우 노력을 기울이는 형편이었다.
그 대신 질적으로 맞춤과 비교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상품을 맞춤가격 보다 3∼4할 낮은 값으로 내놓았다.
요즈음 대기업들이 기계제품으로 대량 생산해내는 기성복들의 값이 오히려 엔간한 양장점의 맞춤복 보다 더 비싼 것과는 대조적 이라고나 할는지-.
당시 서비스센터 경영에 참여했던 동료 디자이너들은 그때 기성복제작이 잇속이 있어 보여서 시작했다기 보다는 국민생활을 위해서는 누군가가 믿을만한 기성복을 만들어 내놓아야할 시기라고 느끼고 일종의 사명감을 갖고 임했던 것 같다.
기성복은 누군지 모르는 다수 대중을 겨냥하는 상품이기 때문에 디자인은 대체로 무난하고 보편성을 띤 것을 주로 택했고 연령층은 옷감의 빛깔이나 무늬로 구별을 했다.
이렇게 기성복에 손을 대면서 제일 아쉽게 느꼈던 것이 한국인의 표준치수였다. 양장점 경영을 통한 오랜 경험과 일본의 통계롤 참고로 성인여성 것은 그런대로 어림할 수 있지만 다양한 연령층의 아동복은 난점이 많았다.
올해 9월에야 비로소 국가가 확정한 한국인 표준치수가 나온 것은 늦었지만 국민의 생활합리화를 위해서나 한국섬유업계 발전을 위해서 반가운 일이다.
디자이너협회는 서비스센터 경영과 병행해서 63년11월부터 매달 두번씩 기성복 발표회도 열었다.
아직은 관심권 밖에 있는 기성복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높이고 보급을 서두르기 위한 시도였다.
그 무렵 노라 노씨도 미우만(지금KAL빌딩 자리) 백화점 3층에 「노라노의 집」이란 기성복집을 냄으로써 우리나라는 바야흐로 레디메이드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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