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이슈] 15번 바뀐 대입제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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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신등급제 도입으로 저주받은 1989년생, 우리가 무슨 죄가 있나요."(고1)

"내신에 수능.본고사까지 치르느라 '피 본'선배들의 아픔을 이 후배들이 짐작이나 할는지…."(94학번)

'대입 시험 몇 달 앞둔 고3 중반에 갑자기 본고사 폐지, 예비고사 시행 등의 날벼락을 맞았던 우리들의 황당함은 어떻고….'(81학번.69학번)

한국의 대입 제도는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광복 후 15번이나 바뀌었다. 4년에 한 번꼴이다. 역대 정부는 조금만 문제점이 드러나도 수술대에 올렸고, 정권이 바뀌면 여지없이 난도질을 당했다. 이 와중에 휘둘려 고생한 건 물론 수험생들이다. 숱한 제도의 실험대상이었던 수험생들은 제도가 바뀔 때마다 적응하느라 고생했고, 유.불리가 엇갈려 웃고 울어야 했다. 학력 저하 등 부작용이 뒤따르기도 했다.

2008학년도 새 대입제도를 적용받는 고1 학생들이 제도에 반발해 지난 7일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선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바뀐 제도를 처음으로 적용받았던 선배 세대들 중에서도 이런 고1 학생들을 보면서 "우리도 못지않게 고생했다"고 토로하는 사람이 많다.

지금 갓 30세가 된 94학번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처음 시행된 수능을 두 번이나 치른 유일한 학번이다. 14년 만의 국어.영어.수학 위주의 본고사가 부활된 중압감을 견뎌내야 했고 내신 반영이라는 새 제도의 실험 대상이 됐다.

정보통신업체 직원인 김어흥(고려대 국문학과 94학번)씨는 "제일 불쌍한 세대는 삼수한 94학번인데 재수하니 교과서 바뀌고, 삼수하니 제도가 바뀌어 수능 두 번에 본고사까지 치러야 했다"고 회상했다.

81학번들도 할 말이 많다. 이들은 수십년간 시행돼 온 본고사가 대입시험을 불과 몇 개월 앞둔 시점에서 폐지되는 황당함을 겪었다. 김재삼(서울대 공대 81학번) 나노메트릭스코리아 부사장은 "다른 과목은 대충 하면서 영어.수학 중심으로 3년 내내 본고사 준비에 매달린 상위권 학생들은 그동안 별로 신경쓰지 않던 전 과목 예비고사가 당락을 결정하게 돼 혼란을 겪었다"고 말했다. 물론 '부담이 줄었다'는 이유로 본고사 폐지를 반겼던 학생도 많았다. KT 인포텍 직원인 안훈(한양대 산업공학과 82학번)씨는 "상당수 학생이 일본 대학 본고사 수학문제 풀이나 영어 독해집 '1200제'같은 어려운 참고서는 내던졌다"고 말했다.

97학번들은 부활됐던 본고사가 다시 폐지됐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컨설팅 업체인 HCG의 컨설턴트로 일하는 조건영(서울대 언론정보학과 97학번)씨는 "본고사 때문에 국어.영어 과외를 했는데 본고사가 없어진다는 얘기를 듣고 과외를 그만뒀다"고 말했다.

69학번들도 81학번 못지않게 느닷없이 제도가 바뀌어 황당함을 겪었던 세대로 꼽힌다. 대기업 전직 간부인 조재경(56.고려대 경제학과 69학번)씨는 "시험 4개월 앞두고 예비고사라는 게 갑자기 생기는 바람에 전 과목 공부를 위해 학원으로 몰려가는 등 불안해 했던 학생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대입제도 전환기에 애환을 겪었던 세대들은 "대입제도를 너무 자주 바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는 한목소리다. 그러나 "아예 10년 이상 한 제도를 유지해라" "대학 자율에 맡겨라" "100% 만족스러운 제도는 없다. 순응해야 한다"는 등 각기 다른 처방을 내놨다.

정책사회부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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