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2)제75화 패션 50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5·16혁명의 영향으로 신생활복운동이 붐을 이루던 그해 여름 우리네 복장계에는 또 하나의 변화가 있었다.
당국의 유사단체 통합정책으로 내가 회장을 맡고 있던 대한복식연우회와 또 다른 디자이너 모임인 이 디자이너협회(회장 이종천)가 하나로 합치게 된 것이다.
단합총회는 61년8월27일 하오3시 국제복장학원 강당에서 열렸는데, 오랫동안 분립되어 있었던 관계로 단합에 상담한 난관이 있을 것이라고 외부에서는 예상한 모양이지만 사전에 양측 준비위원들끼리 여러 차례 만나서 의견을 나눈 덕분에 막상 총회날은 아무런 잡음이나 이견 없이 순조롭게 진행을 볼 수 있었다.
50여명의 양측 회원이 모인 가운데 새로운 모임 명칭의 결정과 15명의, 이사진 선임이 총회의 주요 안건이었는데 새 함의 명칭은 대한복식디자이너협회로 결정하고 초대 이사장으로는 내가 선정되는 영광을 입었다.
당시 선정된 15명의 초대 이사진은 다음과 같다. (괄호안은 그 당시 직함)
▲이사장 최경자(국제복장학원원장) ▲전무 오례종 (아담양장점) ▲상무겸 선전 서수연 (아리사양장점) ▲총무 윤진갈복(국제복장학원강사) ▲재무 김경애 (경기 양재학원장) ▲사업·섭외 견덕균(한국민예사) ▲조직 박순기 (서라벌양재학원장) ▲교육 용갑순 (서울편물학원장) ▲양재분과위원장 한희도(보오그양장점) ▲감사 김순희 (제일편물점) ▲평이사 최금인(라모드양장점) 박광현(조타양잠점) 강말원(디자이너) 손경자 (디자이너) 김필중 (뉴스타일양재학원장).
이렇게해서 발족을 본 대한복식디자이너협회는 그 첫 사업으로서 전국적인 규모의 복장연구발표회를 기획했다.
우리 복식업계의 발전이나 디자이너의 자질향상을 위해서는 새로운 인재발굴이 절실하다는데 의견의 합치를 본 까닭이었다.
그래서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전국적으로 발표회 출품작을 모집하고 각 학교에도 적극저인 참여를 요청해서 마감일에는 1백30점이 넘는 응모작을 접수할 수 있었다.
멀리 부산·대구·광주등 전국 각곳에서 온 응모작들을 협회 회원들이 모여 심사한 결과 입선된 의상은 모두 66점.
하나 하나가 만든 이의 정성이 그대로 살아있는 견실하고 호감가는 디자인이었다.
입선자 중에는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신 현역 교사도 몇 분 있었고 대학생으로는 숙명여대 의류학과 학생들이 대거 참여해서 이채를 띠었다.
입선작 발표회는 62년 4월21일 국민회당에서 열었는데 1, 2, 3층을 꽉 메운 1천2백여 관중 앞에서 강영숙 아나운서 사회로 해병대 밴드의 연주까지 곁들이는 등 대대적인 행사가 되었다.
그러나 외적인 큰 규모와는 대조적으로 발표회 자체의 분위기는 신생활복 붐에 꼭 어울리게 수수하고 견실한 것이어서 관중들은 물론 매스컴의 보도도 아주 호의적인 것이었다.
이날 발표회에 쓰인 옷감들은 모두 우리 직물업계에서 내놓은 순국산 복지들이었기 때문에 1천8백환 짜리 포풀린 원피스에서 시작하여 체일 비싼 옷이 1만8천환짜리 앙상블이었으니 다른 의상발표회와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이런게 제한된 소재를 써서 만든 신인들의 작품이었는데도 기성디자이너 못잖게 뛰어난 테크닉이나 참신한 디자인 감각이 엿보이는 수작들이 많았다.
특히 모시로 만든 원피스나 삼베로 만든 농촌 남녀의 일복 등은 관중들의 많은 관심과 갈채를 모았다.
이날 발표된 의상중 반 이상이 행운권 추첨에 의해 관람객에게 선물로 안겨진 것은 한층 흐뭇한 장내 분위기를 조성해서 피로와 긴장 속에 첫 행사를 마련했던 협회 회원들의 조바심을 깨끗이 씻어주었다. <계속> 최경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