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링게르주사 맞으며|명맥 잇는「보은대추」|한땐. 한 그루 털어도 "딸 시집 보냈다"|거목이면 연말 수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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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후드득 후두독 굵은 빗방울처럼 대추알이 떨어진다.
『바람아 바람아 불지마라 대추 꽃이 떨어지면 보은 큰애기 원앙 길에 울고 간다.』
대추에 얽힌 민요가 아직도 마을 주민들 입에 오르내리고 대추씨 든 라도 많이 발라먹어 아가씨들 입술이 뾰족해졌다는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상판리 대추 마을.
남한일대의 대추 값을 주무르고 나라의 큰 잔칫상에 으르던 보은 대추는 씨가 잘고 살이 많은데다 맛이 단게 특징.
『옛날 제가 총각 땐 우리 마을이 3천냥 관이라 했어유. 대추 천냥·뽕 천냥·나무 천냥 이렇게 따졌지유. 6·25가 지나더니만 하늘을 덮던 대추나무가 허리 둥개서부터 병들어 죽더니만 몽땅 죽어 버리고 l천냥(뽕)만 남았시유나
외속리면 상판리 권중환씨(48)는 보은대추 찾으려면 내속리면을 가라고 일러준다.
구곡양장 말티 고개를 넘어 거주대찰 입구 정일품 소나무가 바라보이는 면사무소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옹기증기 l0여 호의 초가지붕이 대추알로 포근히 감 싸여 있다.
김옥윤(75) 한옥순(65) 두 노인 부부는 올해로 꼭 30년째 상판마을에서 대추밭을 일구고 있다.
어린애 볼처럼 발그스레 물이 들고 터질 듯 포송포송 살이 오른 대추알을 줍는 노부부는 대추알의 빛깔로 가을을 알고 그 대추를 거둬들이며 늦가을을 느낀다.
20여 가구 중 김씨 노인이 25년생 50그루, 5년생 50그루, 모두 1백 그루를 심어 이 마을에선 제일 큰 대추밭을 일궜다. 김씨 할아버지는 제일 큰 나무에서 잘 따면 10말이 나온다고 한다.
1말(생대추) 가격이 l만2천원. 김씨 할아버지는 1년이면 10섬 이상을 수확, 연간 순소득 2백 만원이상 올린다.
이 마을에서 10섬 이상을 수확하는 집은 5∼6가구.
『옛말엔 대추나무 한 그루 털어 딸 시집 보낸다 혔어. 조생 대추 생으로 팔고 늦 대추 거둬 건추 (마른 대추)로 팔면 두 늙은이 떵떵대며 살지」
김씨 할아버지는 4남3녀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 보낸 게 대추나무 덕이라며 껄껄 웃는다.
한약에는 대개 몇 알의 대추와 생강이 따르게 마련.
대추열매는 진정, 수렴(수렴), 자양강장의 효과를 가지고 있어 의학적으로도 귀한 약재로 인정되고 있다.『우리 나무도 지난주엔 내내 링게르를 꽂고 있었구만유. 또 풍년 들라고 대추나무 시집보내기도 하구유.』 한 할머니는 대추나무 시집 보내기 얘기를 하며 슬그머니 할아버지 눈치를 살핀다.
대추나무는 줄기가 아래쪽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사람의 물구나무서기에서 두 다리를 벌린 형태. 가지 사이에 굵고 긴 돌을 끼워 주는 게 대추나무 시집보내기다.
『가짓새가 좀 다쳐도 좋구먼. 그래야 알이 많이 달리지」 김씨 할아버지의 실명은 나무 줄기나 잎새에 탄소가 많아야 열매가 많이 맺히는 법인데 탄소는 나무 위에서 생겨 뿌리로 내려가니 이를 돌로 꽉 막아놓으면 내려오던 탄소가 나무 위에 머무른다는 이론이었다.
『봄날이면 동네아낙들, 시집보내는 돌 줍기도 걸작이구먼. 서로들 냇가에서 돌을 골라 내 것이 길고 굵어 좋다며 포복요절을 하는 기여」
그러나 그것도 글마다 대추알이 빨갛게 물들던 시절의 얘기. 이제는 집 마당 한 귀퉁이에 볼 상으로나 심었을 뿐 상판리 대추밭도 나무에 꽂힌 항생제 주사에서 보은대추의 아슬아슬한 명맥을 보는 것 같다.<고정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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