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9)제74화 한미외교 요람기|집필을 마치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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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나는 60년2월말 3·15총선거전이 시작될 무렵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일시 귀국하라는 훈령을 받았다. 진해별장으로 귀국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이대통령은『곧 정·부통령선거가 있
으니 국내실정을 직접 파악하고, 귀로에 방콕·제네바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참석하라』 고 지시했다.
마침 이대통령은 첫 선거유세에 나설 계획이어서 나는 진해에서부터 기차로 이대통령을 수행했다.
주요 역마다 기차를 세우고 운집한 유권자들에게 연설하는 방식으로 유세를 폈는데 이대통령은 그때마다 『이 사람이 한공사』라고 나를 소개해 주었다.
나는 투표일을 열흘쯤 앞두고 방콕으로 떠났다. 나는 그곳에서 1주일동안 에카페(유엔경제사회기구)총회의 수석대표로 활동했다.
에카페회의가 끝나자 제2차 유엔해양법회의 대표단에 합류키 위해 제네바로 갔다. 이 회의의 우리 대표만은 손원일 (수석)김용식 김정태 (주인도대사)씨와 나 등이었다.
한참 회의에 참석중인데 국내에서4·19가 터졌다는 뉴스가 날아왔다. 어찌할 바를 가늠키 어려웠으나 우선 주미대사관 일이 걱정스러웠다. 나는 손수석대표에게 『워싱턴으로 돌아가
야겠다』 고 했으나 손수석대표는 『회의를 끝내고 가라』 고 만류했다.
심란한 나날 속에 회의를 마치고 워싱턴에 귀임한 것은 허정 과도정부가 들어선 직후였다. 도착즉시 나는 전보로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나 허수반은 양유찬대사의 사표만 수리하고
나의 것은 반려했다.
이어 정일권대사 밑에서 여전히 공사직을 맡고 있다가 60년9월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아주 사직하고 말았다. 61년 봄 하버드대학의 연구원으로 들어가 1년간 연구한 뒤 65년까지
워싱턴의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다가 작년 봄 이속원외무장관 시절, 박정희대통령에 의해 발탁되어 제네바대표부 대사로 외교가에 복직해 금년 초 주영대사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나는 새삼 국내정치와 관련한 이대통령의 공과를 거론할 입장도 못되고 또 거론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이대통령의 총애를 받고 또 그의 손발이 되어 한미외교 일선에서 뛴 사람으로서 할 말이 있다면 탁월한 외교지휘자로서 그가 남긴 족적을 꼭 역사의 한 모퉁이에 기록해야겠다
는 것이다.
흔히『외교는 국력』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유당시절의 우리 외교는 국력이 없는 바탕에서 외교와 비슷한 것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점은 내가 우리의 국력이
급성장한 70년대에도 계속 외교관 생활을 했기 때문에 더욱 절실히 느끼는 지도 모른다.
사실 초창기 우리외교는 이대통령의 개인 역량에 힘입은 바 컸다. 이대통령은 당시 어느 누구보다도 미국을 잘 알았고, 또 그랬기 때문에 미국과 유효 적절한 협조와 흥정을 할 수
있었다.
예컨대 한미상호방위조약 같은 것은 이대통령이 미국을 몰랐더라면 과연 얻어낼 수 있었을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이대통령은 국제정세를 판단하는데 혜안을 지니고있었으
며 주장을 관철하는데 놀라운 추진력을 발휘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외교에 전혀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배우려는 의욕 하나만으로 외교관을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훌륭한 지도자를 모셨던 탓도 있었지만 겪고 보니 위기에 부닥치면 평상시에 없던 지혜와 용기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감도 있다.
전란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보여준 지원은 두고두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으나 외교일선에서 뛰다 보니 경우에 따라서는 미국의 몰이해로 좌절을 느낀 적도 적지 않
게 있었다. 솔직히 말해 우리 외교는 2차대전후 신생 약소국이 겪은 비애와 고충속에 자라온 것이다.
이 글을 써오는 동안 나는 여러 친지들로부터 격려와 조언을 받았다. 특히 오랜 친구인 김정렬씨(전국방장관)는 그때그때 자신의 경험과 기억에 비춰 사실과 다르다 싶으면 거침없
이 지적을 해주었다.
이를테면 전쟁 중이던 52년12월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한 때 서울에 꽃 전차가 동원됐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며, 첫 휴전회담(52년)의 한국 측 대표를 유엔군 사령관이 임명했다고
한 것도 잘못이라는 것이었다(이대통령이 임명).
또 생산성본부에 근무하는 임광원씨는 첫 휴전회담이 열린 개성의 내봉장이 요정이 아니라 바로 자기 외조부 이현재씨의 사저라고 지적해 주었다.
최규하 전대통령이 『열심히 읽고 있다』 고 격려해준 것도 큰힘이 되었으며 몇 해 전부터 이 같은 기회를 갖도록 권유하고 배려해준 중앙일보사측에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이 글
을 읽어주신 중앙일보 독자여러분, 감사합니다. <끝>
※다음 제75화는 한국복식디자인계의 원로인 최경자여사(국제복장학원원장)가 집필하는 『패션50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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