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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어를 통해 본 "사회사 16년"|한마디 말에 세태가 그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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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유행어는 세태의 산물이며, 야사의 구실까지 한다. 4·19와 5·16의 격낭속에 막을 연 60년대는 우리에게 숱한「정치유행어」를 낳게 했고 고도 성장으로 치달은 70년대엔「경제유
행어」를 낳게했다. 그리고 새 시대를 맞은 80년대-. 본지는 지난 l6년간을 전후한 우리 사회를 상징적으로 증언하는 대표적 유행어를 추출, 이른바 「유행어의 사회사」를 엮어봤다.

<편집자주>

<정치>
물리력의 통치에는 정치가 없고 정치가 없으면 말도 있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정계의 60년대는 5·16후의 군정아래서 정치활동이 재개된 63년부터고 정계의 유행어도 이때부터 양
산되기 시작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의장과 최고위원들이 민정에 참여할 것인가, 아닌가하는 「거취」 문제가 당시 정계의 초점이었다. 「거취」 라는 말이 연일신문에 오르내리고 정계의
관심이 이말 한마디에 집중되었다.
마침내 그 「거취」를 밝히는「소신」이 나왔으나 2·27선언이 3·16성명으로 「번의」 되고 그것이 다시 4·8조치로 「번의」 됨으로써 「번의」 라는 말이 유행어가 됐다.
당시 혁명주체들에 대항해 결집한「구 정치인」의 야당세력이 이합집산에 불신과 암투를 거듭하는 속에 저 유명한「사꾸라」와 「매터도」라는 유행어가 탄생되었다. 그후 약20년간
이 말들이 끊임없이 애용된 것은 우리 정계가 이런 말을 고산할 만큼 발전하지 못했다는 얘기이기도 하지만 이제 이 말은 하도 보편화하여 마치 보통 명사처럼 되고 말았다.
「사꾸라」 란 「상대방진영과 내통, 이쪽을 교란하는 사람」 이란 정도의 뜻인데 「겹사꾸라」 「왕사꾸라」 라는 말까지 나왔다.
당시의 정계가 기여한 또 하나의 탁월한 유행어는 「자의반타의반」. 친김·반김의 알력속에 마침내 외유를 떠난 김종필씨의 출국변에서 나온 이 말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널리 회
자되고있다.
마침내 5대대통령선거 (63년10월15일)가 실시되어「사상논쟁」 을 벌인 끝에 근소한 차로 박정희후보에 패한 윤보선후보는 『나는 선거에 이기고 개표에 졌다. …나는 국민의 「정신
적대통령」이다』라고 했다.
이 「정신적 대통령」 이란 말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됐고 「정신적 ×××」이란 말이 널리 쓰이게 됐다.
이렇게 하여 출범한 제3공화국이 차차 궤도에 오르면서 한일회담이 시작되고 학생데모가 격화되면서「저자세외교」 가 문제되고 「정치교수」 의 수난이 시작됐으며 「화형식」 도
이때에 나타났다.
또 야당인 민정당에는 야당성을 놓고 「진산파동」 이 일기도 했다.
6· 8타락선거 (67년) 에서 「선심공세」 란 유행어가 정착하고 국회에서는 회의장을 바꾸어 3선개헌안을 통과시긴 「환장국회」 와「변칙」 「날치기」란 말의 사용빈도가 높아지
기 시작했다.
6, 7대 국회의원 선거결과 도시에선 야당이, 시골에서는 여당이 다수 당선되는 현상이 나타나 「여촌야도」 란 정치용어가 자주 등장했다.
66년 박정희대롱령의 연두교서는 70년대의 경제를 「소비가 미덕인 시대」로 전망했지만 그런 시대는 10년이 더가도 오지 않고 말만 아름답게 남았다.
장기영경제기획원장관·권오병문교장관·김현옥서울시장등의 박력있는(?)행정에서「불도저행정」이란 말도 나왔다.
69년 3선 개헌을 거쳐 71년 선거까지 가는 과정에서 공화당에는 백남억·길재호·김성곤·김진만씨의 이른바「4인체제」가 확립되었고, 신민당에는 김영삼·이철승·김대중씨의
이른바 「40대 기수」 바람이 불었다. 이어71년 7대 대통령선거에서 박대통령은 「호남푸대접」 논을 극복하고 다시 당선되었다.
그리나 신민당에는 제2차 「진산파동」이 일었으며 공화당에도「10·2항명파동」이 있었고 같은 해「비상사태선언」 이 있었다.
「유신」은 다음 해 72년이었다. 「유신정신」 「유신국회상」 「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 라는 등의 말이 곳곳에서 들렸다. 한해의 구호가 「일하는 해」 「더 일하는 해」
로 됐으며 부정·부조리·불신을 일소하자는「3부추방」운동도 벌어졌다.
같은 시절 국회는 연중행사로 「무더기처리」를 하면서 여야격돌로 성명전이 잦았는데 이완돈신민당대변인은 공화당이 제대로 집권당구실을 못한다고 꼬집어「식객집단」이란 말을
써 이 역시 오래 기억되는 말이 됐다.
불미스런 어떤 의원에 고위층의 「경고친서」 가 내려가 낙천사유가 되고, 유신하의 야당좌표를 논리화해 이철승씨가 제창한 「중도통합론」이 시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유신」 에 저항한 「반체제」인사들이「민주회복」운동을 벌이면서 「양심선언」 이 자주 있었다.
국회가 차차 무력해져 의원들간에「애보기」 라는 말도 유행됐다.
박동선사건등으로 한미관계가 어려울 때 박동진외무장관이 한 「불편한 관계」란 말은 그후 여러 분야에서 애용되었다.
10·26이후 이른바 「3김시대」에「권력형 부정부패」로 말이 많자 이후락씨의「떡고물」얘기가 크게 유행했다. 자기는 떡(정치자금)은 만졌지만 고물(부스러기돈)만 떨어졌다는 것.
김재규가 흉행 후 했다는 「한다면 합니다」란 말, 「소행사·대행사」 란 말은 요즘도 부분적으로 유행되고 있다. 아울러「그때 그 사람」이란 말도 노래와 곁들여 유행했다.
80년 5·17이 나자 「해바라기」가 지탄대상이 됐다. 해바라기와 같은 기회주의적 정치 행태를 비판한 말이다.
「새 시대」가 되면서 가장 크게 유행한 말은 「단임정신」 과 「주인의식」.
임기를 한번만 한다는 각오로 일하는 정신, 남의 일처럼 하지 말고 주인처럼 일하는 의식이란 뜻이다.
「개혁의지」 란 말도 분명 오늘의 정치유행어다.
지난 20년의 정치유행어를 들이켜보면 당시 정치의 「모습」 한 가닥이 드러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체로 밝고 적극적인 것보다 뒤틀리고 꼬집고 비트는 유행어가 많았던 것은
우리 정치의 한 단면이 그랬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는지. <송진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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