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다 같이 행복해지는 길, 춤추며 찾았어요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고원지(서울 수락중 1)양은 평범한 소녀다. 하지만 그에겐 꿈이 있고, 꿈꾸는 이유가 있다. 소년중앙은 자신의 꿈을 미래가 아닌 현재에 펼치고 있는 10대들을 만나봤다. 사진=장진영 기자

‘요즘 아이들에겐 꿈이 없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립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이니 좋아하는 일도 미래를 위해 미뤄두라고 가르쳤던 건 학교와 어른들이었죠. 그런데 이제는 중학교 1학년 땐 꿈을 찾는 데에만 몰두하라니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도대체 꿈은 어디에 숨어있는 걸까요. 그런 혼란의 한켠에선 교과 과정과 관계 없이 자신의 꿈을 실천하는 10대들도 많습니다.

서울댄스프로젝트 춤단 단원 고원지(서울 수락중 1)양도 그 중 한 명이죠. 안무가를 꿈꾸는 원지양이 자신의 꿈에 대한 글을 소중에 보내왔습니다.

나, 춤을 사랑하는 열네 살

저는 수락중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학생, 열네 살 고원지입니다. 춤을 사랑하고 내 몸의 일부처럼 생각하지요. 처음 춤에 흥미를 느낀 건 유치원 학예회를 준비하면서였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 동네 춤 대회에서 1등을 해 문구세트와 꿈에 그리던 놀이공원 티켓을 받고 어리둥절했던 기억도 나요. 좋아하는 춤을 췄을 뿐인데 말이죠. 특별히 춤을 배울 곳이 없었던 어린 시절엔 매일 집에서 춤만 췄어요. 4학년부터는 학교 K팝 댄스부에서 활동했죠. 추운 겨울 난방이 되지 않는 연습실에서 친구들과 서너 시간씩 죽도록 연습했어요. 대회에 나가 상도 많이 받았고요. 나중엔 동네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죠.

춤에 흥미를 잃어버린 사춘기

더 많은 장르의 춤을 배우기 위해 6학년 때 댄스학원에 등록했어요. 원장님은 제 실력을 알아보시고 기획사 오디션을 추천해주셨어요. 하지만 아직은 만족할 수 없는 실력이라 생각해 참가하지 않았어요. 또 주어질지 모르는 기회를 위해 열정적으로 연습을 하던 어느 날, 갑자기 춤에 흥미를 잃어버렸어요. 사춘기가 온 거죠.

친구들은 학교 끝나면 놀러 다니고 자유 시간도 많아 보이는데, 저는 춤을 추고 밤 늦게 집에 와 숙제를 하다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어요. 그런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몸도 힘들고, 괜한 억울함과 짜증 그리고 뭔지 모를 서러움이 밀려들었어요. 이 길로 계속 가야만 하나, 왜 춤을 추어야 하나 의문이 들었죠.

방황이 이어지던 어느 날, 엄마가 종이 한 장을 내미셨어요. 아직 어린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어준 ‘서울문화재단-춤단’ 지원서였어요.

‘서울댄스프로젝트’는 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춤으로 소통하고 즐거움을 나누자는 프로젝트다.

어른들 틈에서 ‘아리랑’에 맞춰 오디션

1차 서류 시험에 합격하고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공개 오디션을 보러 서울문화재단에 갔어요. 어린이들이 많이 지원할 줄 알았는데 모두 어른들이어서 깜짝 놀랐어요. 게다가 오디션 음악이 댄스 음악에서 갑자기 일 년에 한번 들을까 말까 한 ‘아리랑’으로 바뀌는 거예요. 스트리트 댄스(순수무용이 아닌 거리에서 생겨난 춤)만 추던 제겐 아찔한 순간이었어요. 다행히 결과는 합격이었죠.

춤단 워크숍이 시작됐어요. 나이도 어리고 키도 덩치도 작다 보니 모든 동작을 크게 해야 할 것 같아 온 힘을 다했죠. 그러다보니 다리에 쥐가 나고 근육통에 시달려 매일 밤 온몸에 파스를 붙여야 했어요. 갑자기 터진 코피가 멈추지 않아 학교에 지각할 때도 있었어요. 그래도 춤단이 된 걸 후회하지 않았어요.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이죠.

지하철에서 복면 쓰고 게릴라 춤판

드디어 결과물을 사람들에게 보여 줄 때가 왔어요. 춤단은 지하철·마포대교·홍대·남산·광화문 등 서울 곳곳에서 게릴라 춤판을 열었어요. 퇴근길 지하철 객차에 올라타 복면을 쓰고 춤을 췄죠. 갑작스런 공연에 놀라면서도 함께 춤추며 즐거워하는 승객들의 모습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거나 거부하는 몇몇 이들에겐 괜히 움츠러들기도 했지만요.

홍대와 남산에서 펼쳐진 즉석 댄스파티 ‘달빛 발광 클럽’도 인상적이었어요. 남녀노소, 국적불문 다 함께 춤을 추었죠. 아빠 또래 아저씨 두 분이 박자에 맞지 않는 춤을 추시는 걸 보니 아빠 생각도 나더라고요.

한여름 광화문에서 춤추며 시민들과 분수에서 물장구 친 일, 선유도 공원을 ‘춤추는 섬’으로 바꿨던 일도 잊을 수 없네요. 그땐 너무 힘들고 더워서 그냥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싶었어요. 그래도 무대에 오르면 관객들이 환호해줘 뿌듯했답니다. 그땐 제가 마치 연예인이라도 된 것 같았어요.

춤단에서 알게 된 현대무용의 매력

저는 중학생이 된 올해에도 춤단에 참여했어요. 하지만 세월호 사건으로 게릴라 춤판이 모두 취소되고 말았지요. 대신 작은 쇼케이스를 열었어요. 공연명은 ‘어쩌다 보니 쇼케이스’. 시민들과 만나는 첫 번째 자리였죠. 지난 6월 28일엔 ‘시민청 활짝 라운지’에서 ‘우리는 영웅을 믿지 않는다’라는 김성훈 안무가의 작품을 첫 공연으로 올렸어요. 공연 내내 춤으로 서울을 누비던 1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어요.

그동안 저는 K팝과 스트리트 댄스 위주로 춤을 췄어요. 가장 가까이에서 쉽게 접할 수 있고, 신나기 때문이죠. 하지만 춤단에서 무용가들과 만나며 현대무용의 매력도 알게 됐답니다. 현대무용은 난해하고 지루한 장르인 줄만 알았는데, 춤을 통해 많은 감동과 기쁨을 줄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장르를 불문하고 가능한 모든 춤을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고원지양은 스트리트 댄스 중에서도 락킹과 걸스힙합을 즐긴다. 이제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가능한 모든 춤을 추고 싶어한다.

진심을 담은 춤으로 희망과 사랑 전해

춤단은 저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어요. 무대에서 즐기는 법도 알게 해 주었고요. 그래서 올해 용기를 내 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 Mnet ‘댄싱9’에 참가했어요. 열심히 준비해서 두 번째 관문까지 진출했답니다. 비록 방송에는 출연하지 못했지만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춤들을 만난 소중한 경험이었죠. 꿈을 향한 또 하나의 발판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춤이 몸의 언어라고 생각해요.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짓일 수 있지만, 몸에서 나오는 언어는 솔직해요. 온전히 진심을 담아 춤을 춘다면 고통 받고 소외되고 슬픔에 빠진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 희망과 사랑을 나눠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내가 춤을 추는, 춤을 춰야만 하는 이유이고요. 그래서 나는 오늘도 춤을 춥니다.

글=고원지, 정리=이경희 기자 dungle@joongang.co.kr,
사진=장진영 기자 artjang@joongnag.co.kr,
헤어&메이크업=성신여대 메이크업디자인학과 3 권성연,
의상=아디다스 오리지널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