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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의 영감, 그 흔적을 따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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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호 16면

파리 캉봉가 31번지 샤넬의 아파트 거실에 있는 초상 사진(1957) ⓒ Mike de Dulmen/All rights reserved

인생 여정-. 패션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1883~1971)의 삶은 기나긴 여행이었다. 어디론가 떠났다 머물렀고, 익숙해질 때 쯤 다시 짐을 꾸렸다. 여정은 프랑스 소뮈르에서부터 오바진·물랭·도빌을 거쳐 베니스·뉴욕·파리로 이어졌다. 매번 다른 그곳에서 그는 영원히 기억될 패션 아이콘을 하나 둘 탄생시켰다.

10월 5일까지 열리는 DDP ‘문화 샤넬전’

8월 30일부터 10월 5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는 ‘문화 샤넬전-장소의 정신’은 전설적 디자이너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전시다. 머물렀던 장소 중 의미있는 10곳을 골라 ‘공간이 창작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준다. 이를 위해 각 장소에 걸맞는 회화·조각·사진·동영상·책·소품 등 500여 점이 동원됐다.

‘문화 샤넬전’은 샤넬을 다양한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전시 프로젝트다. 2007년 이래 모스크바·베이징·상하이·파리를 거쳐 올해 서울에 왔다. 샤넬의 인생은 여든 여덟으로 막을 내렸지만 자유와 다름에 천착했던 그의 이야기는 또다른 방식으로 여행 길에 올라 있다.

내부를 블랙으로 통일시키고 부분 조명으로 음영을 강조한 전시장 내부. 관람객 시선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투명 진열장으로 전체를 꾸몄다. 샤넬 제공

고아처럼 자랐던 수녀원이 스타일의 원천
DDP의 M3와 A1 행사장에 들어서는 순간, 일단 분위기에 압도된다. 널찍한 공간에 아무 장식 없이 검정색 단상으로 구분된 10개의 코너. 그곳엔 환하진 않지만 따뜻하게 느껴지는 황금빛 조명 뿐이다. 샤넬 하면 떠오르는 절제된 우아함을 그대로 차용하는 듯하다.

각기 다른 장소를 구분짓는 상징은 딱히 없다. 도슨트 프로그램도 따로 없기 때문에(휴대전화 QR코드 오디오 해설은 가능) 전시를 즐기려면 그의 삶에 대해 간단히 알고 가는 게 좋다. 열두 살 때부터 수녀원에서 성장한 뒤 카페의 무명 가수가 되고, 모자 디자이너를 거쳐 당대 여성들의 스타일을 바꿔 놓는 전설이 되기까지의 일련의 스토리 말이다. 그를 늘 새로운 곳으로 이끌었던 유럽 귀족·부호 남성들과의 스캔들까지 알아두면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꼼꼼히 보려면 두 시간도 모자라겠지만 처음과 두 번째 코너가 가장 눈여겨 볼 만하다. ‘유년기의 인상’은 그가 태어난 소뮈르가 배경이다. 당시 농촌은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점차 몰락해 가고 있었다. 샤넬 역시 농민 출신 부모를 뒀다. 이런 연유로 그는 땅에 대해, 밀이삭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보였다. 그의 파리 캄봉가 31번지 아파트에 놓였던 다양한 밀이삭 장식품, 살바도르 달리가 1947년 선물했다는 밀이삭 그림이 이를 증명한다. 금빛 밀이삭 자수가 들어간 블랙 드레스(1960년 S/S 오트 쿠튀르)까지 보고 나면 그의 영감이 패션으로 어떻게 가시화됐는지 확실히 감잡을 수 있다.

두 번째 코너인 ‘오바진의 규율’ 역시 전시 의도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오바진은 샤넬이 자란 수녀원이 있던 지역. 전시품을 보면 그곳의 거의 모든 것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녀원 작업복을 본뜬 하얀 칼라의 블랙 드레스, 묵주에서 영감을 얻은 진주 목걸이, 십자가 모양 펜던트 등은 샤넬의 절제된 취향이 그 당시 형성됐음을 일러 준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수녀원 기도실에 있었다는 12세기 스테인드글라스 일부다. C자 모양의 기하학적 무늬가 겹쳐져 있는 이 작품은 샤넬의 더블C 로고가 어디서 탄생했는지를 단박에 알려준다.

권태가 마음에 똬리 틀 때 항상 길 떠난 샤넬
샤넬이 어떻게 밀리터리 재킷을 디자인하게 됐는가는 세 번째 코너에서 알 수 있다. 샤넬이 수녀원을 나와 독립했던 물랭은 바로 군대가 주둔하며 축제와 파티로 흥청대던 소도시였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인연은 다음 코너로 이어진다. 물랭의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며 만난 마주(馬主) 에티엔 발장을 따라 샤넬은 르와알리유 성에서 살게 되고, 이후 말의 안장에서 영감을 받아 특유의 퀼트 핸드백 무늬를 디자인하게 된다. 이 시기 남성 승마복을 입고 찍은 샤넬의 사진 한 장은 여성이 바지를 입게 되는 ‘패션 혁명’의 역사를 눈으로 확인시켜 준다.

본격적인 디자이너로서의 활동은 다섯 번째 코너(‘파리에서의 독립’)에서부터 나타난다. 영국 신사 보이 카펠의 도움으로 파리에서 모자 공방을 열게 된 샤넬은 당시 유행과 다른 극도의 단순한 디자인으로 큰 성공을 거둔다. 다양한 모자 스케치 중 놓치지 말아야 할 사진 한 장이 있다. 거리의 여성들을 찍은 모습인데, 샤넬 스타일의 옷을 입고 샤넬을 그린 삽화집을 거리에서 보고 있는 이들을 통해 샤넬이 또래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음을 알게 된다.

샤넬은 영감의 자양분을 해외로까지 넓혀간다. 보이 카펠의 사망 뒤에 찾아간 베니스(여섯 번째 코너)에서 그는 도시의 상징인 사자 조각상(샤넬의 별자리이기도 하다)은 물론, 비잔틴 시대 전통 장식들을 향후 주얼리 컬렉션과 단추 문양에 그대로 차용한다.

1차 세계대전 중 사교계 인사들이 피서차 모인 비아리츠(일곱 번째 코너)에서는 러시아 황제파 귀족사회와 인연을 맺고, 여기서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를 소개받는다. 향수 ‘넘버5’를 만든 인물이다. 연인이었던 영국 최고의 부호 웨스트민스터 공작을 따라 도버 해협을 건넌 뒤에는 그의 옷을 트위드 재킷이나 캐시미어 카디건 등의 여성복으로 재해석하기도 했다(여덟 번째 코너). 각 코너마다 스토리에 딱 맞는 전시품과 회화·의상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현대 미술과의 교류와 상업적 성공에 터전이 됐던 뉴욕(아홉 번째 코너)을 거쳐 전시의 마무리는 샤넬의 모든 것이 집약된 파리 캄봉가 31번지 그녀의 아파트다. 부제 역시 ‘샤넬 정신’이다. 그는 자신의 아파트를 수많은 오브제로 장식했고, 한 편의 연극 무대처럼 꾸며 놨다. 사자상과 성모상, 십자가 외에도 거울로 만든 계단은 익히 화제가 됐던 사실. 전시에서는 이를 사진으로 감상할 수 있다.

방대한 규모의 전시를 보고 나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있다. 누구보다 드라마틱하고 화려한 삶을 살았던 샤넬. 그럼에도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냐는 거다. “나는 항상 길을 떠났다. 권태가 마음속 깊이 똬리를 트는 게 느껴질 때면, 나는 떠났다.” 회고록 한 권 남기지 않은 그이지만 생전의 한 마디가 답을 대신하는 듯싶다.



▶문화 샤넬전: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
www.thereservation.kr에서 빠른 입장 예약 가능. 무료.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샤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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