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교구 백5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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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한국가톨릭은 9일 「조선교구」설정 1백50주년을 맞았다. 1831년 9월9일 교황 「그레고리오」16세는 두개 교서를 발표했다. 하나는조선대리감목구를 북경교구에서 독립시킨다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브뤼기에르」주교를 초대 대리감목으로 임명하는 것이었다. 샴(태국)의 부주교였던 「바르탤레미·브튀기에르」가 교황청의 그 결정을 안 것은 1년 뒤의 일이었다. 그나마 「브뤼기에르」는 이 땅에 입국하기도 전에 만주에서 세상을 떠났다.그의 유해는 뒤에 l931년 서울명동대성당 지하실에 옮겨졌다. 기록상 외국선교사의 첫 입국은 1594년 임진왜란 때 왜군을 따라온 포르투갈 사람 「그레고리오·데·세스페데스」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포르투갈인 「가스파르·빌렐라」는 1570년 일본에서 인도 고아로 가는 길에 보낸 편지에서 한국선교계획을 말하고 있다. 『일본에서 배로 10일쯤 가면 코라이 (Coray 고려)라는 나라가 있다. 나는 4년전에 그곳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길이 막혀 못갔다.』 최초의 한국인 신자는 이승당이다. 그는 1784년초 북경에서 자의로 입교했다. 세계교회사상 부교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가톨릭을 받아들인 것은 한국교회의 특색이 되고있다. 그러나 최초의 목회자는 이벽이었다. 이승당은 정야종형제와 함께 장위원 (지금 명동) 앞의 김범우의 집에서 강론을 들었다.1785년 봄이었다. 이것이 한국 가톨릭 교회의 시초다. 1795년 중국인신부 주문모가 전교하여 1만여 신도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1800년(신유년)순조가 즉위하면서 교란이 닥쳤다. 주신부와 3백명이 순교한 것도 이때다. 파리외방부교회가 적극적으로 조선교구의 선교에 나선 것은 「브뤼기에르」주교의 사후다. 1833년 중국인 신부 유방제가, 36년엔 프랑스인 「페트르·모방」이, 37년에 「로망·마리·조재제·앰베르」주교가 입국, 조선교회는 비로소 완전한 체제를 갖출 수 있었다. 이런 여파로 김대건 (안드레아)이 마카오로 유학, 최초의 신부가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그도 교란의 희생자였다. 가장 컸던 교란은 1846년 대원군이 일으킨 병인교란이었다. 그때 희생자는 성직자 9명과 신자9천여명이었다. 박해와 수난은 한국 가톨릭 사상 1백년을 넘게 계속되었다. 그것은 장렬한 순교의 역사다. 반상의 배급도, 빈부의 격차도, 유식무식도 장애는 아니었다. 그들은 하느님 신앙 앞에 목숨을 던졌다. 명예로운 순교역사의 그늘에서 지금 한국 가톨릭은 14개교구 1백32만명의 대교세를 자랑한다. 축복할 일이다. 민족사의 빛이 되고 사회양심의 누룩이 되고자 노력하는 교회가 되어야할 계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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