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증조부 이력까지 들춰내 공격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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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거스르는 '신연좌제'

대한민국 헌법 13조 3항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연좌제는 60여 년 전 해방공간 속 늪이었다. 한 번 빠지면 좀처럼 헤어나기 힘들었다. 정적을 제거하는 데 그만한 주홍글씨가 없었다. 보수인사에겐 ‘친일파’란 딱지, 진보세력엔 ‘빨갱이’란 낙인이면 됐다. 촌수도 상관없었다. 외조부에 증조부까지 동원됐다. 그 연좌제가 21세기에 다시 등장했다. 여야 대결이 사생결단식으로 거칠어지고 좌우진영 싸움이 격화되면서 신연좌제가 다시 춤을 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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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장인의 남로당 활동 경력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당시 같은 당 이인제 후보가 “영부인이 될 사람이 남로당 선전부장으로 7명의 우익인사를 살해하는 현장을 지켜보고도 전향하지 않고 교도소에서 사망한 사람의 딸이라면 70만 국군의 사기에 영향을 주지 않겠느냐”며 노 후보 장인의 좌익 활동을 문제 삼았다. 대검찰청이 1973년 발간한 『좌익사건실록』에는 노 전 대통령의 장인 권오석씨가 49년 6월 남로당에 가입해 50년 1월 창원군당 선전부장으로 활동한 것으로 나온다. 노 전 대통령은 후보자 합동연설에서 “그럼 제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라고 호소해 이 위기를 극적으로 벗어났다.

 2004년 총선 당시, 고(故) 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도 친형이 월북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김 전 고문이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에 대해 “아버지의 과(過·잘못)를 말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전여옥 대변인이 논평에서 “3명의 친형이 월북한 김 의원”이라는 표현을 써 논란이 됐다. 김 전 고문은 “실종된 것은 맞지만 월북했다는 사실은 확인된 바 없다”고 사태를 수습했다. 당시 선거전이 과열되면서 상대 당이나 후보에 대한 ‘아니면 말고’ 식의 흠집 내기가 도를 넘었다는 비판이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도 연좌제 덫에 걸릴 뻔했다. 2012년 대선후보자 TV토론회에서 당시 통합진보당 후보였던 이정희 의원으로부터 “‘일본군 장교 다카키 마사오, 한국 이름 박정희. 친일·독재의 후예”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들었다. 한동안 진보 인터넷 사이트에선 이 주장이 확산됐다.

 연좌제를 통한 흠집 내기는 이념 대결이 첨예했던 노무현 정부 시절 유난히 기승을 부렸다.

 2004년 당시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 등 소속 의원 3명이 연좌제에 발목이 잡혔다.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 때 일본군 헌병 오장(하사)이었다는 사실이 보도되면서 신 의장은 열린우리당 의장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비슷한 시기 인터넷을 중심으로 부친이 일본군 헌병 출신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던 같은 당 이미경 의원은 “사실임을 확인했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선에서 논란을 봉합했다.

김희선 당시 의원도 부친이 만주국 특무경찰로 근무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김 전 의원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일을 잊지 못했다. 그는 11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한이 맺혔다. 그 일로 6개월 동안 매장당하고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떨어졌다”고 울먹였다. 그는 “조상의 행적을 빌미로 괜찮은 사람의 능력을 폄하해선 안 된다”고 호소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친일인명사전』에서 김 전 의원 아버지의 이름이 빠져 김 전 의원의 의혹은 벗겨졌지만 기억 속 멍은 그대로 남았다.

 얼굴조차 본 적이 없는 증조부의 이력이 문제가 된 일도 있다. 참여정부 시절이던 2005~2006년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는 홍보수석에서 물러난 뒤 조선말(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탐관오리로 악명을 떨친 전북 고부군수 조병갑의 증손녀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후 그는 동학농민혁명군 유족들을 직접 찾아가 사과까지 해야 했다.

조 교수는 11일 “고부군수가 증조부로 밝혀졌을 때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게 없다’고 해명한 게 잘못이었다. 그게 국민을 화나게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 교수는 “아직도 그 일로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인권 침해란 생각이 들 정도”라고 하소연했다.

 ‘아니면 말고’ 식의 의혹 제기가 반복되면서 이를 자제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고개를 들고 있다.

 새누리당 이군현 사무총장은 “친일 후예라는 이유로 무작정 비판하고 반대하는 건 일종의 연좌제다. 이는 21세기 현 상황에 맞지 않을뿐더러 국민 통합과 화합을 저해한다”고 자제를 촉구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은 “조상과 고향은 본인이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논쟁을 일삼는 건 불필요하다. 문제는 본인이 지금 어떤 역사관과 민족관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교수는 “폐지된 연좌제의 잣대를 들이대는 건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 주는 것”이라며 “개인의 가족사를 거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정치 공세”라고 말했다.

정종문·김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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