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청자·백자 쏟아져 자랑스럽지만 연안고기 못 잡아 생계 걱정-신안군 위도 유물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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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6백50여년의 신비를 지키느라 그렇게도 어둡고 거센가 보다.
청자의 청아함과 백자의 단아함, 그 고귀한 자태를 숨겨두었던 신안 도덕도 앞바다.
임자도와 위도 사이를 관통하는 조류가 황해의 조류와 부딪쳐 거센 파도를 만들고 휘돌림이 급류를 이루어 한치만 손을 넣으면 금새라도 삼켜버릴 듯 찰흙같이 검푸르다.
먼발치서 보면 그렇게도 넓고 깊은 평온함을 안겨주면서도 가까이 선 냉정히도 외부의 손길을 거부하는 자연의 위험은 인간의 지혜론 헤아릴 수가 없을 것 같다.
지도에서 귓전 따가운 통통배에 실려 송도·사옥도를 지나 뱃길40리. 하얗게 눈 쌓인 듯 염전과 올망졸망 조가비능선이 눈에 드는 4천3㏊ 넓이의 위도바지부두에 뱃머리를 댄다.
행정구역으로는 전남 신안군 지도읍 위동리. 부두에서 신안 유물마을을 찾자면 서북쪽으로 10㎞쯤 달려야 한다. 마을에 들어서는 언덕빼기를 넒으면 왼편 산 능선에 기대 옹기종기 초가지붕을 이룬 방축리 검산마을.
위도 28개 마을 중 유일한 어촌이자 유물발굴 현장이 집뜰처럼 코앞에 펼쳐져 있다.
굳이 발굴현장을 그리자면 마을 앞에 우득선 도덕도에서 임자도쪽으로 직선거리 1㎞지점의 2평방㎞해상.
예전 목선이 다닐 시절엔 군산·인천 등지의 해로로 이곳 어민들 사이엔 치등이라하여 수심이 얕고 파도가 세 어선들이 자주 풍랑을 만나는 곳이다.
검산마을은 47가구 주민 2백41명 중 44가구가 3∼5t급 동력선 25척으로 바다에 줄을 댄 어가들이고 농경지는 고작 2·㏊. 농작물은 자급자족하기도 부족해 2백50여만원의 가구당 소득은 거의 해물에 의존하고 있다.
이 마을이 유물마을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73년1월.
『아따 정신이 확허니 들더랑께요. 그물에 걸린 것은 집에 갖다가 잘 씻거 고것이 억대가 넘는 보물이라니께 워찌 정신이 안들것소.』
바다 및 보물단지를 처음 연 어부 최형근씨(47)는 문화재 관리국에서 유물신고보장금 통지를 받았던 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민어·빙어·농어·꽃게의 황금어장인 현재의 발굴현장에서 조류가 동북쪽으로 도는 중물에 유자망을 내렸다가 그물에 걸린 것을 끌어 올려보니 조개 껍질에 뒤 잎인 청자화병.
어부들 사이엔 조업을 하다보면 흔한 일이고 그물만 찢어 놓아 『재수 옴붙었다』며 다시 바다에 던져 버리거나 깨뜨리기까지 했던 그런 자기종류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모양이 묘한데가 있어 집에 가지고간 것을 당시 적도국민학교 교사로 있던 동생 최평호씨(42·현 목포근무)가 청자 같다며 문화재관리국에 신고한 것이 해저유물의 것 확인이었다.
그후 문화재관리국에서 73년9월부터 금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친 발굴결과 1만5천여점의 유물노다지를 건져올렸다.
발굴된 송·원대 유물 중에는 세계 유일의 명품 청자양각모란문대화병을 비롯 흑유모란문매병 청자정병 등 보물급만도 부지기수.
10여년전만 해도 마을에서는 어쩌다 그물에 걸린 것을 집에 가져오면 쓰레기통이나 어린이들의 놀이감으로 나뒹굴었다.
『요것좀 보소. 마을 안팎에 널부러져 깨진 것들이 이자 생각하니께 다 보물아니었것소. 우습지도 안혀요. 촌사람들인깨 뭘 알것소. 고것들이 돈된다니께 별별일이 다 있었으랑깨.』
마을주민 최인섭씨(41)는 유물발견이 알려진 후 한동안 마을은 전에 없이 외지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했다.
고물상이라며 주민들에게 접근하는 외지사람들은 은근히 『자기 살 것이 없느냐』며 묻고 집집을 돌며 사발 등을 몽땅 뒤지거나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제기의 열전까지 훑어갔다는 것.
그러나 주민들 사이에 바다에서 건진 물건들이 어마어마한 보물들이고 개인이 가지면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 알려지자 성한 것은 물론 깨진 조각까지도 몽땅 신고를 하는 신고사태를 빚기도 했다.
해저유물이 발견된 뒤 섬 주민들 중에는 외지사람들에게 이용당해 도굴에 손을 댔다가 경찰에 검거돼 고초를 당한 사람들도 20명이나 되지만 아직껏 검산마을 주민들 중에는 불미스러운 일이 한번도 없는 것이 이 마을의 자랑이다.
유물이 발견된 것도 해신의 뜻에 따른 것인데 그것을 흠친다는 것은 부정탈 일이고 그런 일을 하면 흉어가 든다는 뱃사람 특유의 뿌리 깊은 믿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을주민들 사이에 구전되어온 전실에는 유물이 발전된 도덕도 앞바다에 관한 토속신앙이 전해오고 있다.
도덕섬은 도둑을 뜻하고 그 마을 뒤편의 칼 모양의 검산과 말 모양의 마산, 장군 산이 있어 장군이 말을 타고 칼을 들어 도둑을 지키니 바다에서 해로운 일용하면 벌을 받는다는 이 마을 최고령의 박하엽 할머니(88)의 설명이다.
또 도덕섬 앞 해상은 4백여년전 백씨 일가가 조상 묘를 쓰고 만조에 손을 씻으니 청어들이 끝없이 몰려왔다는 전설이 내려와 청·백자 발굴을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때문에 마용 주민들은 외지사람들에 의해 유물이 도굴되면 마을의 이름이 더럽혀진다고 자신들이 발굴현장 부근에서 조업을 않는 것은 물론 외지 배들의 침입을 막고 있다.
그러나 검산마을 주민들은 유물을 발견하고 지키는 긍지 이의에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다. 유물발굴이 시작되고 해상 사적지 2백74호로 지정되면서 연안에서 조업을 할 수 없게돼 생계에 큰 지장을 받고있다.
대부분 사채를 끌어다 어구와 배를 장만한 이들에게 눈앞에 황급어장을 두고도 2시간 거리를 나가서 조업을 해야하고 그나마 어획고가 전보다 못해 이잣돈 갚기도 벅차다.
『전에사 기름1말이면 엄청시럽게 잡았는디요. 요사이는 기름반드럼을 써도 잡는 고기가 적으니께 얼매나 피해가 막심허것소. 마음같애서야 싸게 유물을 다 퍼갔으면 쓰겠지만 그래도 마을자랑거리가 없어질까봐 걱정스럽기도 하지라우.』
위도 출장소장 이사윤씨(43)는 유물이 나온다는 긍지도 좋지만 이로 인한 주민들의 피해가 큰 걱정이라고 했다.
이씨의 말로는 발굴이 시작된 뒤 고위층들도 발굴 현장을 많이 다녀갔지만 마을에 들러 주민들의 고충을 들어준 이는 한 사람도 없는 것이 섭섭하기만 하다고 했다. 저녁 해가 지고 별빛처럼 반짝이는 마을 초가의 조가비 불빛은 그래도 유물을 지킨다는 보람에 발굴현장을 지키고 있다. 【글=엄계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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