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인구 6배·자동차는 36배로|해방 36년…숫자로 비교 해본 그때와 오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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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해방 36년간의 변화는 경제·사회적으로 너무도 구조적인 변화여서 단순한 양적 비교로는 그 실제를 가늠하기 어렵다. 숫자로 보는 광복방년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들 숫자의 변화가 사회구조의 변화를 어렴풋이 짐작케 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경제개발에 따른 두드러진 성과가 눈에 띄고 문화적지표의 개선도 뚜렷하다. 그러나 이런 실물의 변화 뒤에는 엄청난 통화증가와 인플레의 고질화라는 뿌리깊은 상처가 아직도 근치 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앞으로의 과제는 이 36년의 후유증을 어떻게 떨어버리고 체질을 개선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인구>
49년 현재 남한인구는 2천16만7천명, 북한은 9백74만 명으로 모두 3천만이 안되었다. 36년 뒤인 81년의 추계인구는 우리가 3천8백72만3천명으로 l·9배, 북한은 1천7백91만 명으로 1·8배로 각각 늘었다. 남녀 비는 예나 이제나 비슷하다. 서울인구는 6배로 늘어났다.

<평균수명>
해방전인 42년의 우리나라 평균수명은 44·9세에 불과했으나 80년에는 거의 66세에 가까워 져 21세나 늘어났다.


GNP가 처음 추 계된 53년에 경상가격으로 4백80억 원이던 GNP는 81년에 44조원을 넘어 무려 9백배로 늘어났으나 그 동안의 물가상승 때문에 달러로 환산한 1인당 GNP는 25배 증가에 그쳤다.

<화폐발행>
36년간 23만 배나 늘어 물가를 크게 자극했다.
이에 따라 통화량도 74만 배로 늘었으며 어음교환 액은 무려 9백만 배로 늘었다.
그러나 해방당시의 혼란기에도 불구하고 어음부도율은 지금과 거의 같은 0·15%를 기록한 것이 자못 이색적이다.

<정부세출>
조세제도가 불완전해 국가재정의 대부분은 원조나 전매수입, 세외 수입으로 충당되었고 해마다 지출이 세입을 훨씬 초과한 적자재정을 못 면했다. 세출규모로는 36년간 무려 72만 배로 늘었고 조세수입은 그 당시 워낙 미미했던 때문에 증가율로는 5백만 배를 넘고 있다.

<물가>
도매물가는 48년에 비해 80년 말 현재 2천47배가 올랐으며 해방 당시 1가마에 1원 꼴이던 쌀값은 4만6천7백 배로 올랐다.
쇠고기 1근은 0·02원에서 4천2백원으로 21만 배, 구두 한 켤레는 0·2원에서 2만5천 원으로 12만5천 배나 비싸졌다.

<미곡생산>
1백84만8천t이던 쌀 생산량은 올 계획 5백47만t으로 3배, 30만t에 불과하던 어획량도 2백60만t으로 8·5배 늘어났다. 그러나 협소한 경작면적 때문에 농가 호당 경작면적은 해방당시의 1·07정보에서 오히려 1·01정보로 줄어들었다. 공업개발과 함께 농업인구비율도 크게 줄었다.

<축산>
농가의 소 사육 마리 수는 당시 55만6천 마리에서 지금은 l백60만 마리로 거의 3배로 늘어났고 돼지는 18만 마리에서 10배 가까이, 닭은 26배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비례하여 늘어나는 육류소비 때문에 쇠고기수입량은 해마다 늘고 있다.

<무역>
48년 당시 1천5백90만 달러이던 수출은 올해 2백5억 달러로 1천2백89배나 늘었고 수입은 1천9백60만 달러에서 2백60억 달러로 1천3백26배로 각각 늘어났다. 수출수도개발과 수입자유화에 따라 무역량은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철도연장>
당시 2천5백57㎞에서 5천8백60㎞로 2·3배나 늘어났고 화물수송량도 3백만t에서 87배인 2억6천7백만t으로 늘어났다. 여객수송량도 크게 늘었다.

<전력사용량>
전력이 비교적 풍부했던 당시의 전력사용량은 4억㎾/H였으나 지금은 3백50억㎾/H로 무려 87배나 늘어났다. 풍부한 석탄 때문에 당시 12만㎘에 불과하던 유류 소비도 거의 3천만㎘에 이르러 2백37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에 따라 원유도입도 크게 늘어 연간 2억 배럴을 넘게 들여오고 있다.

<석탄생산>
유연 탄·무연탄을 합해 풍부한 석탄자원을 갖고 있었으나 남북분단 이후 남한의 석탄생산은 크게 줄었다. 46년 당시에는 27만7천t에 불과, 미미한 실적을 보였으나 70년대 후반부터 석탄개발에 박차를 가해 80년의 생산량은 67배인 1천8백만t을 넘어섰다.

<시멘트생산>
거의 시멘트설비가 없어 46년에는 1만t을 겨우 넘었다.
지금은 1천5백만t을 생산, 1천4백21배로 크게 늘어났다.

<조강 생산>
제철공장이 거의 없어져 연간 1천t에 못 미치던 조강 생산은 포항제철의 설립과 함께 연산8백60만t을 넘어섰고 80년대 말까지는 1천2백만t규모의 대형 제2체절이 세워진다. 36년간 거의 1만 배로 늘어난 셈이다.

<제조업근로자수>
해방당시 12만2천명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3백만 명을 넘어섰고 기타 광업·사회간접자본 및 서비스종사자를 포함한 전 근로자는 1천5백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자동차 보유>
통틀어 1만4천7백대에 불과하던 자동차는 현재 53만5천대로 늘어났고 전화기보유는 5만3천대에서 2백87만대로 54배가 늘어났다.

<신문·도서출판>
신문 보급률은 의의로 낮아 36년간 10배 증가에 그쳤다.
인구가 거의 두 배로 늘어난 점을 고려하면 당시의 높은 신문구독성향이 두드러 진다. 도서출판은 2만여 종으로 거의 1백 배 가까이 늘었다.

<공무원>
48년 건국과 함께 11부4처 3위원회(고시·감찰·경제)에 총14만9천4백77명의 공무원으로 출발했다.
80년 말 현재는 2원15부4처l5청4외국3위원회에 공무원 수는 59만6천4백31명으로 건국당시보다 무려 4배나 늘었다.

<의사 수>
47년에 2천8백30명이던 의사 수는 8배로 늘어나 2만2천5백64명으로 늘어났고 치과의사·간호원 등 의료요원이나 약국·병상수도 크게 증가했다. 병원 수는 2백50배로 불어났다.

<범죄건수>
해방이후의 혼란기를 반영, 범죄건수는 1l만6천 건으로 비교적 많았다.
작년 국내 범죄건수는 60만 건으로 5·2배의 증가율을 보였으나 검거 율은 거의 90%까지 향상되었다. 인구 1천명에 대한 이혼율은 당시 0·1명에 불과했으나 가치관의 변화와 함께 급속히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김영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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