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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5)<남기고 싶은 이야기들>한미외교 요람기 -한표욱|반공포로 석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판문점에서 유엔군 측이 포로교환문제에 관한 양보안을 제시, 휴전협정이 조인만 남은 단계로 접어들자 국내에서는 휴전반대 데모가 격화됐다. 상이군인들의 데모는 미국신문에도 보도돼 이 보도에 접하는 우리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53년5월29일 변영태 외무장관은 『5개국 중립국위원만이 한국내에서 활동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전 한국군을 유엔군 산하에서 탈퇴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병력을 사용할 준비를 갖추었으며 그들 5개국 군대와 일전을 불사할 각오를 하고있다』고까지 선언했다.
마침 얼마 지나지 않아 워싱턴에는 백두진 국무총리가 찾아오게 돼 양대사가 백총리를 수행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방문해 강력한 항의의 뜻을 전달했다.
백총리는 6월초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귀국하는 길에 이승만 대통령의 출국 전 지시에 따라 워싱턴에 들러 「아이젠하워」에게 휴전 반대의 뜻을 표명하게 돼있었다
백총리는 「아이젠하워」에게 의례적 인사를 건넨 후 말문을 열었다. 『한국에서 전쟁을 계속해달라. 중공을 격퇴해야한다. 인천상륙 후에는 군사적 승리를 통해 통일시켜야 한다던 미국이 왜 지금은 태도를 바꾸고 있는가. 미국이 하지 않겠다고 해서 한국은 방관할 수 없다. 한국 혼자서라도 통일과업을 성취하겠다.』
「아이젠하워」는 어이가 없어 의자 등받이로 몸을 뉘었다. 그리고는 『미국이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백총리는 『우리는 모두 죽고 말 것이다』고 대답했다. 『1백만 명의 중공군이 주둔한 채 휴전협정을 체결해 결국은 죽을 바에야 싸워서 죽겠다』고 말했다.
양대사와 함께 대사관에 들어온 백총리는 대화내용을 나에게 상세히 설명해 내가 이대통령에게 보내는 보고서를 영어로 작성했다.
이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백총리와 나는 「케네드·영」 국무성 극동국장의 만찬초청을 받아 부부동반으로 그의 집을 방문했다.
식사를 끝내고 디저트를 들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영」국장이 받더니 나에게 온 전화라고 건네줬다. 전화를 받아보니 내가 평소에 알고 지내던 미국인 기자였다. 『당신네 나라에서 이북으로 송환되기를 거부하는 반공포로를 석방했다는 뉴스가 나왔는데 아는 게 있느냐』고 물어왔다. 내가 국무총리와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고있었던 것으로 생각해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가급적 코멘트를 줄이고 『알고는 있으나 나중에 얘기하자』고 적당히 전화를 끊고 백총리에게 귀엣말로 소식을 알렸다.
커피정도는 마시고 만찬자리를 뜨는 것이 예의에 맞는 일이라서 잠시 앉아 차를 마신 후 황급히 「영」국장 집을 나섰다. 한국시간으로 l953년6월18일 새벽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국정부는 2만7천여 명의 반공포로를 부산·대구·광주·마산·영천·논산·부평 등에 있던 포로수용소에서 이날 자정부터 새벽사이에 석방시켜버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포로석방이 단행되는 순간까지 이 사실을 사전에 알고있던 사람은 헌병총사령관인 원용덕 중장과 송효정 헌병부사령관 등 그 밑의 고급장교 몇 명밖에는 별로 없었다.
포로수용소롤 감시하던 한국군 헌병들은 헌병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포로 탈출을 저지하지 않았다. 반공포로 가운데 6천여 명은 탈출하지 못했다.
일반국민들도 석방된 반공포로들에게 자발적으로 은신처와 음식 등을 제공했다. 이대통령의 포로석방계획은 예상 밖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대통령은 그날로 반공포로석방은 정당한 조치이며 석방은 그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제네바협정과 인권정신에 의하여 반공 한인포로는 벌써 석방시켜야할 터인데 유엔당국들과 또 이 포로를 석방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우리의 설명을 들은 분들은 동정상으로나 원칙상으로나 동감을 가진 것으로 내가 믿는 바이다. 지금 와서는 유엔이 공산 측과 협의한 조건이 국제적 관계를 더욱 복잡케 해서 필경은 우리 원수에게 만족을 주고 우리민족에게 오해를 주는 현장을 일으킬 염려가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험상한 결과를 피하기 위해 내가 책임을 지고 반공한인포로를 오늘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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