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러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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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드물어도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윌리엄·와일러」감독. 엊그제 그의 부음을 들으며 문득 연령을 보니 79세-.
하나같이 우리기억에 생생한 그의 영화들을 생각하면 만년청춘일 것같은데 팔순이다. 예술도 길고, 삶도 길었던 생애다.
예술가로서 그는 누구보다도 행복했을 것같다. 그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감동을 자아냈으니 말이다. 그가 만든 영화치고 최고가 아닌 것이 없었다. 무슨 영화를 만들어도 그 장르에선 정상을 기록했다.
『로마의 휴일』은 희극분야에서 백미를 보여주었으며, 『우리생애 최고의 해』는 사회극으로서 모든 사람들의 생애에 최고의 영화로 더없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필사의 도망자』는 서스펜스물의 절정을 이루었고, 『벤허』는 스펙터클 영화의 극치를 개척했었다. 만년의 『퍼니·걸』마저도 뮤지컬 코미디의 정상이었다.
모두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되었고 몇차례의 앙코르 상영까지했던 영화들이다.
미국영화는 하나의 상식을 갖고있다. 좋게 말하면 「양식」이고, 달리 생각하면 미국인 특유의 기질같기도 하다.
어느쪽이든. 미국영화는 거의 예외없이 해피 앤드와 권선징악을 담고있다.
「와일러」의 명작 『벤허』는 화면이 터질듯 비장과 격정이 넘치는 영화지만, 마지막 장면에선 형장으로 가는 예수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원색적인 복수심과 증오심이 어느새 평화와 희망의 표정으로 바뀐다. 그야말로 너무도 인간적인 정경이다.
『우리생애 최고의 해』는 2차대전이 끝난 이듬해 만들어졌다. 전쟁에서 돌아온 3명의 장정은 승리감보다는 구중중한 현실에의 몰입으로 오히려 참담한 느낌마저 갖게 된다.
반갑게 다시 만난 애인에게 따뜻한 손대신 쇠갈고리의 의수를 내미는 「호머」수병의 모습에 눈물을 흘리지않은 관객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와일러」감독은 역시 해피 앤드를 잊지않았다. 다시 사랑하고 결혼하고, 수수하지만 행복한 생활로 모두들 돌아간다.
「와일러」는 프랑스의 알자스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약관에 미국으로 이민, 아메리컨문화의 굵은 강을 잇게했다. 영화사의 선전원으로, 조감독으로, 2차대전중엔 군인으로, 그는 인생의 고락을 모두 맛보는, 그나름의 풍랑을 겪었다.
그가 성공한 비결이 있다면 바로 최고·최선을 추구하는 절대성실의 정신이다. 무슨 영화를 만들어도 어물슬쩍이 없다.
그 영화마다의 특성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철저하게 최선의 노력으로 최고의 수준을 기록했다. 연출력·기술·정통성에 있어서 그는 빈틈없는 완벽주의자였다.
하긴 그보다 빠른 성공의 길은 어느 분야, 어느 누구에게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예술의 세계에선 최고·최선의 노력과 성실과 진실성이 없이는 어떤 감동도 줄수 없다. 그것자체가 벌써 감동이며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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