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점장의 하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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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점장을 두고 은행의 꽃이라고 말한다. 은행원으로서 은행장은 몰라도 최소한 지점장 한번쯤은 모두가 원하는 자리다.
군대로 말하면 직접 전쟁을 치러내는 일선사단장들이다.
그들의 능력과 수완여부가 지점의 성패를, 또 그것들이 모여서 은행 전체의 부침을 결정짓는다.
지점장의 하루는 몹시도 바쁘다. 한적하게 올라오는 결재서류에 도장을 찍으며 앉아있을 시간이 없다.
대출고객들은 아랫사람에게 맡겨도 되지만 예금주는 왕처럼 모셔야한다.
예금을 한푼이라도 더 긁어모으기 위해서는 동네구멍가게 주인이라도 붙잡고 매달려야 한다.
지점장 A씨의 하루를 살펴보자.
간밤에 잠을 설쳤던 까닭에 아침부터 머리가 띵하다. 어제 본점에서 열렸던 지점장회의에서 예금실적이 부실하다는 지적을 받은 이후부터는 줄곧 예금계수만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이번으로 두번째 경고를 받은셈이다. 전임 지점장이 예금벌레로 소문났던 것이 더 부담이 된다.
그동안은 전임자가 올렸던 실적으로 그럭저럭 끌어왔지만 최근들어 기간이 끝난 예금주들이 그와의 의리를 쫓아 빠져나가는 바람에 예금실적이 눈에 띄게 줄고있는 것이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얼마전 모은행 지점장처럼 하루아침에 「저축추진역」으로 발령이 나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도 자기가 지점장으로 근무하던 같은 지점안에서 말이다.
여느날처럼 출근전 30분동안 간부직원들과 간단한 회의를 끝내고 예금사냥에 나섰다.
오늘은 틀림없이 주겠다고 약속한 K기업앞으로 5천만원짜리 예금증서를 미리 끊어서 호주머니에 챙겨넣었다.
원칙에 어긋나지만 은행에 나오게 할것없이 K기업사장실에 가서 직접 예금을 받아내기 위한 친절(?)에서다.
다른 지점장들도 그렇겠지만 예금이라는 것이 그냥 앉아있는다고 굴러오는것이 아니다.
샐러리맨들의 한푼짜리 예금보다는 기업들의 뭉치돈으로 승부를 내야한다.
거래를 해가는동안 예금액이 자연증가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다른 은행에 들어가있는 예금을 빼내 와야 유능한 지점장이 될수있다.
지연이니, 학연이니 가릴것없이 가능한 모든 수만을 동원하는 것이 지점장의 첫번째 자격요건이다.
다행히 기대했던대로 지점장 A씨는 5천만원짜리 자기앞수표 1장을 들고 들어와 입금계직원에게 건네줬다.
눈치만 살피던 직원 모두가 박수를 쳤다. 이런날은 퇴근길에 지점장이 으레 한잔 사는 날이다.
오후들어 밀렸던 결재서류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는 대출요청고객들을 만난다.
한건 한날은 무리한 돈을 빌어달라는 고객들을 만나도 별 짜증이 안난다. 대부분의 경우 첫말부터 한도가 없다고 잡아떼지만 장차 예금을 기대할수있다고 판단될 때는 없던 한도를 만들어서라도 대출을 해준다.
청탁배격운동이 벌어지고부터는 외부로부터의 대출압력이 현저하게 줄어든것은 참 잘된 일이다. 본점에서 높은 사람이 전화를 걸어와도 말하는 톤이 훨씬 부드러워졌다.
표현자체부터가 지시가 아니라 부탁조로 바꾸어졌지만 그럴수록 눈치있게 대처해야 유능한 지점장으로 인정받는다.
사실상 하지도, 받지도 말라고 하는 청탁이나 강제예금등은 그 한계가 여간모호하지 않다.
지점장 입장에서는 항상 달라는 사람보다 줄돈은 적으니 골라서 줄수밖에 없고 게다가 지상과제인 예금총대를 위해서는 대출이 가장 효과적인 미끼인 것이다.
자연히 모르는 사람보다는 아는 사람에게 돈을 꿔주게되고 그 혜택의 대가로 예금청탁을 당당하게 해온것이 오랜 습관으로 굳어버렸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한 것이 탈이지만-.
하오4시30분 지점셔터가 내려지지만 그때부터 하루결산이 시작된다.
예금을 많이 끌어오는 것 못지않게 그날 장사를 어떻게 했느냐를 나타내는 교환실적을 따져야 한다.
흔히들 『오늘 교환에 졌다, 이겼다』로 가름한다.
자기 지점에서 발행한 수표에 의해 나가야할 돈과 다른 은행이나 지점에서 발행한 수표가 들어와서 받아낼 돈을 가감계산하는 것이다.
물론 「이긴날」이 많아야한다.
한달에 두번씩 열리는 지점장회의에 참석하면 예금실적과 함께 이 교환실적표가 배부된다. 거기에 매겨진 순위가 지점장의 평점인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물려 있는 기업이 없어야한다.
잘못 부실기업에 물리는 날이면 은행 전체를 잡아먹는다.
명동지점 같은 곳은 대출규모가 1천억원으로 본점영업부와 맞먹는 수준이고 그곳 지점장은 이사못지않은 요직이지만 그만큼 고민도 많다.
외환쪽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이 70%가량을 차지해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언제 또 엉뚱한 탈이 생겨날지 모를데가 바로 그쪽이다.
퇴근길에 직원들과 대폿자리에 어울린 지점장 A씨는 얼마전 스트레스와 고민끝에 건강을 핑계로 스스로 내근부서로 옮겨간 동료 지점장의 심정을 이해할수 있을 것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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