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중의 대사 주미대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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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주미대사- 외무장관자리와 함께 외교관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오르고 싶어하는 대망의 자리다.
지금은 주미대사를 하다 외무장관이 되면 영전이라고 하지만 초대 장면대사같은 분은 국무총리로 들어오기보다도 그 자리에 더 있기를 희망했다고 한다.
9백여명의 외교관이 동경해 마지않는 대사자리에 오른 47명의 현역대사들도 저마다 기회를 엿보는 대사중의 대사자리이기도 하다.
워싱턴DC 매사추세츠가 2324번지에 자리잡은 1백평 남짓한 지하1층 지상3층의 빨간벽돌의 대사관이 주미대사의 지휘본부. 그는 이곳에서 50여명의 소장외교관과 1백여명의 고용원을 진두지휘한다.
…역대 주미대사는 초대 장면대사를 시발로 양유찬·정일권·장리욱·김정렬·김현철·김동조·함병춘·김용식·유병현씨등 모두 10명.
이중 직업외교관 출신은 김동조·김용식씨등 단지 2명 뿐이다.
33년의 외교사에서 단 2명의 직업외교관만이 주미대사가 됐다는 사실에서도 주미대사직의 특수성과 비중이 드러난다.
대미외교는 건국이후 우리외교의 중심이었다. 따라서 주미대사직은 건국이후 30여년간 우리외교를 외부로 표출하는 중요한 창구의 하나였다.
그 상징적자리에 올랐던 10인의 면면을 보면 주미대사직에 부여하는 비중을 실감하게 된다.
초대 장대사를 필두로 정일권·김현철씨는 총리 또는 내각수반의 경력을 지녔으며 또 정씨와 김정열·유병현씨는 군의 최고위장성출신이고 직업외교관인 김용유·김동조씨는 외무장관을 지냈고 양유찬·장리욱·함병춘씨는 당시 집권자의 개인적 신임이 두터운 인물들이었다. 양대사의 경우는 주미대사로서 초기한일회담의 수석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대 주미대사들의 면면은 상당한 거물이라야 주미대사를 할수있다는 기준을 정립했다.
…그러면 우리정부가 주미대사직에 부여하고있는 중요도에 상응한 위치를 주미한국대사는 워싱턴에서 과연 차지하고있는가.
워싱턴에서 우리 대사가 평상시 접촉할수있는 한계는 국무성의 아시아·태평양담당차관보 정도.
가깝게는 「홀드리지」에서 「홀브루크」「하비브」「마셜·그린」차관보등이 역대 주미대사의 카운터파트로 낯익은 얼굴들이다.
「헤이그」「밴스」「키신저」「로저스」, 국무장관이 된 후의 「러스크」쯤되면 특별한 경우가 아닌한 1년에 한번 얼굴을 맞대기가 쉽지않다.
워싱턴 외교가에서의 한국대사의 비중은 제3세계나 다른 아시아국가보다는 다소 높을지 몰라도 NATO·일본·이스라엘보다는 무겁지 않다는게 일반적 평이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국가이익이 분명하게 부각되고 커질때에만 한미관계도 대등한 관계로 발전될수 있다는 것이 주미대사를 지낸 이들의 한결같은 술회다.
이에비해 비슷한 비중의 주일대사가 일본에서 받는 예우는 한일양국관계가 어떤 때이든 미·중공과 함께 톱레벨로 분류되는 대접을 받는다.
주일한국대사는 일외상, 때로는 수상까지도 비교적 자유롭게 만날수있으며 각료·고위정치인과 수시로 어울린다.
…외무장관과 주미대사를 다같이 지낸 우리외교계의 두 거물 김동조·김용식대사의 외교스타일을 비교하는 이런 얘기가었다.
『돌다리를 건널경우 김동조대사는 앞뒤 가릴것없이 호기있게 건너고 보고, 김용식대사는 전날밤에 조사를 시킨뒤 낮에 자신있게 건너간다』
또 하버드를 나은 학자출신의 함병춘대사와 직업외교관인 김용식대사를 비교하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약간 말썽을 빚는 재미교포들이 함대사에게 재미교포를 국민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한데 대해 함대사는 국내에 살면서 세금을 내고 병역의무를 다해야 완전한 국민이 아니냐는 요지의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그 대답에 틀림은 없지만 그말 때문에 함대사는 교포들로부터 적지 않은 곤욕을 겪었다. 그러나 같은 질문을 받은 후임 김용식대사는 『같은 피를 받은 한민족이면 모두 우리국민이죠』고 대답했다는 얘기다.
양유찬2대 대사의 9년재임에 이어 67년부터 73년까지 6년간, 두번째 장수를 누린 김동조대사는 정력적인 파고들기로 72년 뉴스위크지에 워싱턴의 6대대사로 선정된 최초의 한국대사가 되기도했다.
그러나 그때의 로비외교는 박동선스캔들과 겹쳐 후임인 함병춘·김용식대사에게 큰 곤욕을 치르게 한다.
10명의 주미대사중 초대 장면대사는 미국의 6·25 참전결정을 위해 큰 역할을 했다. 양유찬대사는 전후복구를 위한 PL480등 경제원조와 군원확보를위해 동분서주한 그야말로 원조대사였다. 4·19직후 과정과 5·16후 두차례에 걸쳐 재임했던 정일빈대사는 5·16후 불편했던 한미관계를 정상화하는데 노력했다. 김현철씨는 1·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행하기위한 차관도입교섭에 경제통으로서의 자질을 발휘, 차관대사란 이름을 얻었다.
함병춘대사는 학계·언론계를 상대로 미국지식층의 대한이해를 높이는데 노력했으나 박동선사건의 진흙탕속에서 많은 괴로움을 겪었다.
김용식대사는 박동선사건의 마무리와 불편한 한미관계개선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높고 큰 외교관의 정상 주미대사직은 생각만큼 호화스런 자리는 아니다. 주미대사의 봉급은 다른대사와 마찬가지로 특1급대사봉급 8백20달러와 재외근무수당 2천3백달러, 배우자수당 4백50달러등 모두 3천5백7O달러정도. 이같은 액수는 물가가 비싼 일본의 4천달러나 아프리카·남미등 험지대사의 4천∼5천달러에 비해서도 많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주미대사는 직책의 중요성때문에 정보비·판공비등에서 타지역대사보다 월등히 많은 비용을 쓸수 있다.
주미대사의 1년 판공비는 우리나라돈으로 4천만∼5천만원정도고 여기에 정보비와 경우에 따라 특별히 무역협회의 특계자금을 지원받기도 한다.
또 주미대사는 주일대사와 함께 일반대사보다는 격이 높아 가령 공관장회의에 참석차 귀국했을 경우 일반대사들이 단체로 버스를 탈때도 외무부에서 특별히 내주는 캐딜랙을 따로 타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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