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계순(80) 할머니는 열다섯 살에 경북 예천군 지보면 신풍리로 시집을 왔다.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평생 농사일을 하며 남편과 자식들을 뒷바라지했다. 경로당에서 윷놀이를 하거나 화투를 치는 게 여가 활동의 전부였다. 박 할머니는 3년 전 크레파스를 손에 잡았다. 농사일이 뜸할 때면 매일 동네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그린다. 할머니의 대표작은 유채꽃. 도화지 위에 노란색 크레파스를 콕콕 찍어 그렸다.
“촌 할매들이 그림을 그릴 줄 아닛겨(압니까). 선생님이 가르쳐 주니까 하는 거지.”
그 선생님은 신풍미술관 이성은(50·여) 관장이다. 이 관장은 2009년 이 마을에 미술관을 연 뒤 ‘할머니 그림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30여 명이 참여한다. 미술관은 할머니들의 작품(아래 그림)을 상설 전시한다. 제목은 ‘할매가 그릿니겨?(할머니가 그렸습니까)’.
이 관장은 미국에서 미술공부를 하고 돌아와 교사·큐레이터로 활동했다. 몸이 불편한 시어머니(89)를 모시려 시댁이 있는 이 마을에 정착했다. 이곳은 파평윤씨 집성촌이어서 고민을 터놓지 못하고 가슴에 묻고 살아온 ‘며느리’들이 많다. 이 관장은 “할머니들은 힘든 세월을 내색하지 않다가 그림으로 표현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신성식 선임기자, 박현영·장주영·김혜미 기자, 도쿄=이정헌 특파원, 김호정(중앙대 광고홍보학과)·이하은(서울여대 국어국문학과)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