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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1)|제74화 한미외교 요람기(28)-중공군 개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한 것은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한지 2주일 후의 일이었다.
전쟁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평양과 원산을 방문하고 국군은 나진까지 쳐들어가 통일의 꿈으로 부풀었던 우리는 또다시 악화되는 전세에 전전긍긍하지 않으면 안됐다.
「맥아더」장군은 11월3일 유엔안보리에 10월25일의 중공군 개입을 정식 보고했다. 유엔의 분위기는 일시에 달라졌다. 유엔군이 38선을 넘느냐는 문제가 논의되던 때와는 판이한 것이었다. 38선 돌파 시비가 일었을 때만해도 중공이 개입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우려가 막연하게 제기됐지만 이제는 중공군 개입으로 전쟁이 어떤 성격으로 바뀌느냐는 문제로 바뀌어졌다.
각국 대표들의 태도가 멈칫해진 것이 역력하게 나타났다. 각국 대표도의 걱정은 한국전이 한반도 밖으로 확전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미국도 이점을 모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중공군이 개입하기 전부터 「맥아더」장군은 본국으로부터 북진은 하되 만주 국경에는 접근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압록강으로 진군하되 중공 접경에는 한국군으로 대치하고 시베리아와 인접한 함경도도 미군은 배치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미군과 소·중공 사이에는 완충지대를 유지, 유엔군은 한반도 허리부분에만 주둔시키자는 생각이었다.
확전을 방지하기 위한 이러한 완충지대 설치는 중공군이 내려온 직후 영국에 의해 재기된 일도 있었다.
50년 11월 10일 미국의 UP통신은 소식통을 인용한 런던발신 기사에서 『영국은 미국과 중공이 한반도에서 정면 충돌하는 것을 막기 위한 타협안으로서 한만 국경의 일정한 폭을 완충지대로 설정, 이를 중공군이 점령케 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완충지대안이 나오자 외무장관에서 유엔대사가 된 임병직 대사는 즉각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그 같은 구상은 한국 영토의 촌토일지라도 한국인에게 귀속되며 또 현재의 전쟁이 국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수행되고 있으므로 도저히 승낙할 수 없는 일이다. 공산군의 섬멸만이 통일의 방법이다.』
우리 대표단의 활동은 멈칫해진 각국 대표들에게 적극성을 불어넣기 위해 복잡하고 긴박해졌다.
통일은 전쟁에서 이기는 것에 의할 뿐이다. 중공이 참전했다고 우방 행동이 달라지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중공 개입은 북한 침략과 마찬가지로 유엔에 대한 도전이다. 유엔 참전은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서다. 그런 경신으로 중공을 격퇴해야 한다. 중공을 몰아내야 세계 평화가 유지된다.
그러나 일부 국가의 대표들은 현 병력으로 중공을 격퇴할 수 있겠는가, 세계 대전의 위험성이 높지 않은가 하는 우려를 나타냈다.
남한에 비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던 나라들은 유엔군이 중공군에 적극적인 태도를 굳힐까봐 걱정이었다.
인도가 다시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미얀마를 포함한 아시아 몇 개국과 이집트 등 중동국가들이 끼어 모두 13개국의 이름으로 결의안을 제출했다.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는 역할을 수행할 3인 위원단을 구성하자는 내용이었다.
결국 이란 외무장관이던 「엔테잠」 유엔총회 의장, 「라우」 인도 대표, 캐나다 대표인 「피어슨」외상 등 3명으로 위원단이 구성됐다.
이들은 유엔군 사령관과 중공군 측에 대해 어떤 조건으로 한국전을 가라앉히고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 질의를 보냈다. 휴전 문제가 최초로 거론된 것이다.
우리 대표단은 각국 대표들을 상대로 휴전 구상에 대한 치열한 반대에 나섰다. 휴전은 어불성설이며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여론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미국이 쉽사리 휴전 구상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미국측은 3인위에 대해 답변했다. 7개항의 조건을 제시했다.
①전투를 즉각 중지한다. ②38선을 기준으로 20마일 폭의 비무장 지대를 설치한다. ③후전을 완벽하게 하기 위한 모든 적절한 군사적 조치를 취한다. ④유엔 한국위원단이 휴전을 감시한다. ⑤한반도 문제 전반에 관한 해결이 이루어지기 전에 포로를 1대 1로 교환한다. ⑥휴전 성립을 유엔총회가 정식으로 인준한다.
이같은 조건이 제시됐을 때 우리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미국 정부가 전쟁 중지 방향으로 움직여 휴전 아이디어에 응하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황은 계속 유엔군에 불리해졌다. 결국 51년1월4일 소위 「1·4후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됐다.
유엔의 분위기가 어찌나 나빴는지 유엔군 자체도 철수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염려까지 나돌 정도였다. <계속> 【한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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