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8선을 넘어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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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다시 38선 돌파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야겠다.
미국무성과 유엔에서 38선 돌파와 그 이후 문제에 관해 논란이 일어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 유엔 대표단에 몇 차례 지시를 내렸다.
38선을 넘지 않는 한반도 문제의 해결은 있을 수 없다. 즉 38선을 없애라는 것이었다.
미국이 중·소를 자극시키지 않기 위해 38선 돌파 결정을 비공개적으로 내리고있는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초조했다. 통일이 코앞에 다가왔는데 당연한 결정이 미뤄지고 있는 데에 역정이 대단했다.
50년 9월 27일「무초」주한 미 대사로부터 서울 탈환 소식을 듣고『서울에 가는 것이 나는 매우 기쁩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나를 기쁘게 해줄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평양입니다. 빨리 실지를 회복해 사슬에 묶였던 북한동포를 어루만져주고 싶습니다』며 감격했다.
이러한 이 대통령에게 한국군이 38선을 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실로 큰 불만이었다.
이 대통령은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한국군 단독으로라도 38선을 돌파하라고 다그쳤다.
이 대통령은 대구 육군본부의 참모총장실에 나타나『왜 북진하지 않는가』고 호통을 쳤다.
뒤에 들은 얘기지만 이 대통령은 이 자리에 작전참모 강문봉, 헌병참모 최경록씨 등 참모들까지 모아놓고 협박(?)도 하고 회유도 하면서 북진을 명령했다.
『지금 여러분은 유엔군 사령관의 지휘를 받고있지만 나의 통솔을 받는 대한민국의 군인이 아닌가. 38선은 이미 없어졌다. 장군들은 내 말을 듣겠는가, 아니면「맥아더」장군의 말을 듣겠는가.』
이 대통령은 손수 작전명령서를 즉석에서 작성, 정 장군에게 북진을 명령해 정 장군이 몹시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고 한다.
결국 38선은 10월1일 한국군에 의해 돌파됐다. 국군의 날이 10월 1일로 결정된 것은 바로 이날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알고 있다.
미국정부도 10월4일에는 정식으로 미군에 38선 돌파명령을 내리고 10월 9일에는 미1군단이 개성에 들어섰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은 어제까지의「전쟁상태로의 복귀」목표에서「통일 한국의 실현」라는 적극적인 정책으로 전환했다.
미국은 이러한 정책을 10월 7일 유엔에서 통과된「한국의 독립에 관한 결의안」으로 명백히 선언했다.
결의안은 한반도에 대한 유엔의 기본입장을 ▲전 한국의 통일되고·독립된 민주적 정부수립 ▲안정·평화상태의 확고한 수립 등으로 천명했다.
6월 25일과 27일 안보리가 채택한 결의안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느 면에서는 47년 유엔총회를 통과한 한국문제에 관한 결의안으로 환원하는 것이었다.「안정·평화상태의 확고한 수립」은 한반도 전체를 대상지역으로 하고 있었다.
이 결의안의 통과로 사정은 한국이 원하는 그대로 된 셈이었다.
결의안이 통과될 때 임병직 장관과 우리들은 대단히 만족해서 각국 대표들을 만날 때마다 사의를 표명했고 찬표를 던진 대표들도 기뻐했다.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고 통일의 모먼트가 될 결의안까지 통과되자 이에 대해 제동을 걸려는 움직임이 나오기 시작했다.
인도가 선봉에 나섰다. 비록 남한이 전체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또 유엔이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했더라도 남한의 주권이 자동으로 북한에까지 미치는 것은 문제점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 무렵 유엔이 북한을 점령한 후 통치문제를 놓고 군정을 실시하느냐, 신탁통치를 하느냐는 등의 대책이 거론되어 추선 돌파 후 2주일정도 통일의 설렘 속에서도 신경이 날카로 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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