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의 소만 국경서 관측기와 씨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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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흔히 사주팔자는 타고난다고들 한다. 원래 외과의사 지망생이던 내가 기상 방면에 몸담으리라고는 내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했기에 말이다. 내가 중학교 5학년이었던 어느 날 학교 게시판에 만주국 국비생 모집광고가 붙어 있었다.
눈 때문에 외과 지망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을 때라 의사가 돼서 인간을 진단하는 것이나 기상학자가 되어 대 자연을 진단하는 것이 별로 다를 것이 없지 않겠느냐, 어느 면에서는 후자가 더 스케일이 크고 보람 있는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 길을 걷게된 동기가 된 셈이다. 3년 간의 과정을 마친 후 지지하루 관상 대에 배속되었다. 첫 봉급을 받아보니 정말 이럴 수가 있나.
같은 직급인데 일본인과 40%의 봉급 차가 나지를 않는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후의 첫 시련이었다. 민족 차별의 분노를 안고 사표를 냈더니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국비 장학생이니 사표수리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대신에 근무조건이 좋은 소만국경 지대인 만주리에 일자리를 옮겨주었다. 만주리는 고위도 지방이어서 여름철에는 박명 시간이 길어 밤이 짧고 겨울에는 섭씨 영하 49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지대여서 기상 관측을 하는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맨손으로 관측기를 잡으면 동상에 걸리고 말기 때문이다.
해방 후 1946년 (미군정 시대)부터 우리 나라 관상대에 근무하게 되었다. 내가 받은 직급은 5급4계단 (도지사 급)이었는데 그 후 사범학교 교사로 자리를 옮겼더니 8급4계단으로 무려 3급이나 떨어졌다. 결국 기상 직은 다른 직종에 비해 상당히 우대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54년 다시 옛 집으로 되돌아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의 관상대 실정은 말이 아니었다.
다 낡아빠진 측기와 통신시설, 더구나 중국대륙과 북한 일대의 기상자료는 전혀 받을 길이 없어 지상일기조차 한 장도 제대로 그리지 못한 채 일기예보의 흉내를 내고 있었으니 그 적중률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물론 그동안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매일같이 변덕스런 날씨와 씨름하면서 때로는 보람 (1962년 1월 속초 해난사고에 대한 예보 적중으로 홍조소성 훈장을 받음)을 느꼈으며 좌절감도 맛보았다.
지나고 보니 내 나름대로의 길을 후회 없이 굳게 걸어왔다고 본다. 이제 후진들도 많이 양성되고 어느 정도의 시설도 갖추어져서 예보 적중률도 80%선을 웃돌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산업기상 방면에 좀더 과감한 투자로 자연재해 경감에 힘써야 될 과제가 남아 있다고 본다.
김광식 (중앙 관상대 예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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