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관과 낙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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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영국의 사미가「새뮤얼·존슨」같은 사람은『역사는 불행의 숙술』이라고까지 말했다. 「볼테르」는 좀더 시적인 무드를 살려『역사는 인간의 범죄와 재난의 초상화』라고 했다. 감수생이 예민한 문인만의 애기는 아니다. 『로마제국의 쇠망」이란 명저를 남긴 역사가「E·기번」도 『역사는 정말로 인류의 범죄와 어리석음과 재난의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 고 했다.
사실 세계력사의 어느 토막을 조명해 보아도 포망보다는 절망이, 악도보다는 비극이 더 많았던 것같다. 「A·J·토인비」같은 절세의 사학자는 오히려 그런 가운데 연류가 발전하며 오늘에 이르렀다고 했다.「도전과 실전」의 법칙이 그것이다.
요즘 경희대의 한 연구소에서 우리나라 대학생을 강대로 미래에 대한 관심도를 조사한 것이있었다. 10명 가운데 4명은 인류의 장래를 비판하는 쪽이었다. 낙관적인 전망은 10명중 겨우 2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상과 야망에 집착하는 젊은세대들의 의식으로는 오히려 이편이 자연스러운지도 모른다.미래를 의시하고 오시하는 자세야말로 이들에게 사명과 생명감을 불어넣어줄 것이다. 안주하고, 턱없이 낙관하는 자세는 젊은이 답지 않다.
역세적으로 말하면 인류의 포망이나 낙관은 최악의 배신과 불신속에서 시작되었다. 톨스토이」가 남긴 불후의 명작 『전쟁과 평화』에는 이런 대화가 있다. 19세기 러시아토류사회의 부패와 전제정치에 번민하던 주인공「안드레이·볼콘스키」는 「나폴레옹」의 러시아침입에 대항해 싸우다가 중상을 입는다. 전장에서 피를 흘리며 누워있던 그는 순간 눈을 번쩍 뜨고 푸르른 하늘을 본다. 『어째서 지금까지 저 높은 하늘이 눈에 비치지 않았단 말인가. 이제 비로소 정신이 든 나는 실로 행복하구나』 귀족청년「안드레이」는 명예와 야심과 세속적인 우화속에서가 아니라 극한의 절망속에서 푸르른 하늘을 쳐다보며 행복을 절감하는 옵티미스트가된 것이다.
「안네·프랑크」의 일기는 13세의 유대인 소녀가 겪은 수난기다. 독일군에 쫓기며 죽음과 이웃한 상황에서 이 소녀는 실로 세상은 끝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일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렇지만 하늘을 우러러 보면 모든 것은 지상으로 돌아가고 이 몰락함도 끝나고 평화와 압적이 세계에 깃들일 것을 나는 믿고있다』.
세계는 그의말대로 아직 평화의 낙원이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끝나지도 않았다.
인종의 삶은 여전히 전화와 전쟁과 살육에 쫒기고 사람들은 굶주린 짐승모양으로 물질을 뒤쫒고 있다. 그러나, 인류는 아직 이성마저 버리지 않았으며, 절망할 때마다 더 큰 맹기와 야망을 갖고 새로운 출발을 기약했었다. 젊은 이들이여! 야망을 갖자, 우리시대의 철학자 「B·러셀」은 말했다. 『행복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먼저 지성을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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