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남편을 돕는 6순의 아내 사무장|퇴역 대법원 판사 방순원-왕기낭씨 부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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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6순의 부인이 남편을 도와 한 사무실에서 일하기 3년. 집에선 부부지만 출근하면 남편은 변호사요, 부인은 사무장이다. 대법원 판사를 지낸 방순원 변호사 (67)의 부인 왕기낭 여사 (65). 왕 여사는 평생동안 가난했던 법관 남편을 면류관처럼 소중히 여겨왔다.
『내 사무실엔 나와 집사람, 운전 기사 등 직원이 모두 셋이요. 내가 변호사이고 집사람이 사무장 겸 사환이고 운전기사가 기록 복사·서류 제출 등 잡무를 맡습니다.』
임무 소개를 하는 노 변호사의 표정이 흐뭇하다.
왕 여사가 사무실에 출근하기 시작한 것은 78년 가을. 사무장이 고향에 다니러간 후 돌아오지 않은데다 방 변호사가 갑자기 어지럽다고 앓던 때였다. 식사 시중을 들기 위해 며칠 사무실에 따라나와 보니 어려울게 없는 데다 일을 한다는 보람도 느껴 눌러 앉았다. 월 50만∼60만원의 인건비도 줄게 됐다.
『늙은이가 주착이라고 흉볼까봐 처음엔 주저했어요. 영감님도 부잣집 딸 데려다 고생시킨다며 겉으론 반대했지만 속으로는 좋아하는 눈치가 역력했지요.』
왕 여사가 사무실의 전화 받는 일이나 손님 접대, 차 끓이기도 도맡자 한때 부인인줄은 생각도 못한 친구들이 할머니 여비서를 두었다고 놀리기도 했다.
왕 여사가 결혼한 것은 만 45년째. 당시 방씨는 경성법전을 졸업, 경성지법에서 판임관 견습 (지금의 서기보) 시절이었고 왕 여사는 경성고녀 (경기 여고 전신)를 졸업한 다음해였다. 방씨는 천안의 가난한 농부 집안 출신으로 선린상고를 거쳐 경성법전을 수석 졸업 해 신문에서 대서 특필한 적도 있었다. 예산에서 손꼽히는 지주의 막내딸이던 왕 여사는 중매가 들어오자 흔쾌히 승낙했다.
결혼 4년만인 40년 방씨는 일본 고등 문관 시험에 합격, 판사가 됐지만 천성이 돈과는 담을 쌓은 터였다. 자나깨나 『깨끗하게 살자』는게 입버릇이었다.
부인의 제의로 젊은 판사 부부는 좋지 못한 일을 하면 붉은 줄, 선행을 하면 푸른 줄을 긋는 도표를 벽에 붙여놓고 서로를 격려했다.
장작을 쪼개느라 왕 여사의 손바닥은 굳은살로 변했다. 전차 삯이 없어 큰딸 (사법 연수원 교수인 김광년 부장 판사 부인)이 몇km씩 청운 소학교를 걸어다녀야 했다.
『웬 사람이 방석 밑에 흰 봉투를 넣어두고 간 적이 있어요. 외출했던 영감님이 이 봉투를 발견하고 손을 덜덜 떨며 화를 내시던 기억이 납니다.』
아직 왕 여사는 손가락에 반지를 끼어보질 못했다.
남편인 방씨가 대법원 판사직을 물러날 때 직원들이 해 준 1돈쭝 짜리 금반지가 있었으나 끼지 않고 굴리다 잃어버렸다고 했다.
결혼 때 받은 3돈쭝 짜리 금반지도 결혼식 직후 교회에 바쳤었다.
4남2녀의 자녀들에겐 늘 『소금과 나무와 쌀만 준비하면 된다』고 검소한 생활을 강조해 별명이 「수신 선생」.
지금 살고 있는 서울 서교동의 대지 50평·건평 27평짜리 자택은 15년전 대법원 판사 시절 당시 조진만 대법원장 (작고)이 직원을 시켜 몰래 사준 것. 그때의 은행 융자를 최근에야 다 갚았다.
『법률 지식이 모자라 잘못 판결한 것은 있겠지만 손바닥을 손등이라고 양심에 꺼리는 판결은 해 본적이 없읍니다.』
이것은 노 변호사의 하나 밖에 없는 자랑거리다.
온가족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 집안으로 방 변호사는 새문안 교회의 장로고 왕 여사는 권사다. 변호사 수입 중 생활비만 제하고는 교회 헌금 등 전도 사업에 모두 쓴다. 틈만 나면 마주앉아 성경을 토론하다 서로 상대방이 신앙심이 깊다고 추켜세운다.
『젊어서는 아내지만 나이 들면 친구고, 늙으면 보모지.』
부인이 시간 맞춰 간식으로 과일을 내놓는다. 『사무장 월급 40만원, 사환 월급 8만원을 이달부터 나에게 주셔야해요.』 왕 여사가 정겨운 농담을 던진다.
낡은 철제 책상 몇개에 사방이 법률 서적으로 둘러싸인 서너평짜리 사무실 (서울 정동 피어선 아파트 403호)이 궁전처럼 호화롭게 보였다. <권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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