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부동 낙동강 전선 최후 교두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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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조그만 마을하나를/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한해살이 푸 나무도 온전히/제 목숨을 다하지 못했거니/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이 황폐한 풍경이/무엇 때문의 회생인가를….』
고조지분시인은『다부원에서』라는 시에서 6·25격전지의 참상을 이렇게 흐느꼈다.
75가구 2백77명의 주민이 민족비극의 현장을 지키며 승공정신으로 똘똘 뭉친 경북칠곡군 가산면 다부동.
6·25전쟁당시, 남침을 받은 이래 50여일 동안 후퇴만 거듭하던 국군은 이곳에 최후의 교두보를 구축하고 10여일 동안 밀고 밀리는 혈전을 거듭한 끝에 저음으로 북진의 계기를 마련했다.
처음으로 적의 막강한 주력에 패배를 안겨주며 끝까지 대구를 사수했던 다부동 전투는 영천회전·백마고지전투와 함께 6·25전쟁 중 3대 격전지의 하나로 꼽힌다.
『그때 만약 다부동을 잃었다면 6·25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다부동과 왜관으로 이어진 Y자형의 낙동강방어선이 무너졌다면 대구는 적 지상포화의 사정권에 들어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겪었을 것입니다. 다부동 전투는 개전 이래 후퇴만 거듭하던 아군이 처음으로 작전의 주도권을 빼앗은 결전으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벨단전투와 비슷한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김기옥 연구위원은 다부동 전투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다부동은 예로부터 부산∼대구∼문경∼서울통로의 요충지로 많은 전적(전적)을 남긴 곳이다.
인근 냉산산성은 고려 태조 왕건이 웅거하면서 후백제의 견훤(견훤)과 싸우던 곳.
또 가산산성은 임신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의적의 침략에 대비해 인단18년(1640년)에 축성된 산성으로 영남의 제1관문이자 재1보루이기도하다.
처절했던「그날」로부터 어느덧31년. 무수한 포격으로 별거 숭이가 되었던 산은 울창한 숲으로 짙푸르게 뒤덮였고 전투가 끝난 뒤 주민들이 마을을 다시 일구며 심었던 포플러는 어느새 거목(거목)이 되어 녹음의 터널을 이뤘다.
다부동은 31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개발의욕으로 가득 넘쳐있다.
『비좁은 농지에 기온까지 낮은 산골인데다 아무런 특산물도 없는 가난한 마을로 30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기에는「다부동 주민으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지요. 대구∼안동간의 국도 확장·포장사업에 발맞춰 취락구조개선사업을 벌이고 우리마을을 비육우단지로 조성하기 위해 도당국과 협의중입니다.』
주민 하성국씨(50)는 개발의욕에 가득차 있다.
당시 빗발치는 포탄 속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20여리나 떨어진 유학산 능선까지 식량과 탄약을 날랐던 주민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전쟁을 실감하지 못한 어린이들이지만 다부국교 학생들은 누구나 승전의 내용과 의의를 소상히 알고있다.
학교 과학실에는「다부동 전투-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란 커다란 게시판이 걸려있다.
『매주 일요일에는 항상 전승비 주변을 가꾸며 선생님으로부터 그 때의 얘기를 들어 잘알고 있어요. 우리마을은「승리의마을」이예요.』
최윤식군(12·6년)은 50년8월13일부터 7천6백여명의 국군이 적 3개사단 l만5천명을 맞아 14일 동안의 혈투 끝에 낙동강 방어선을 고수했던 당시 상황을 자세히 외고 있었다.
『마을에 적의 젓 포탄 4발이 떨어진 것은 그해 8월8일이었죠. 그래서 마을 청·장년들은 가족들을 피난시키고 끝까지 남아 전투가 벌어지는 유학산·가산능선까지 지게에 탄약과 밥을 짊어지고 날랐습니다.』
군의 소개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탄약을 나르고 국군병사들의 머리를 깎아주었다는 최임석씨(70)는 고향마을이 적의수중에 들어갈 까봐 무척 안타까웠다고 했다.
마을청년 20명과 함께 특공대를 조직, 북괴군 소좌까지 생포하기도 했었다는 유경화씨(61)는『전투가 끝났을 때는 계곡·능선은 물론 논바닥에까지 적의 시체가 가득 널려있었다』며 처참했던 당시의 격전을 들이켰다.
전쟁이 끝난 후 지금까지도 마을서쪽 야산에는 1958년에 세운 전승비만이 외롭게 서 있을 뿐 다부동 신화는 서서히 잊혀져가고 있었다.
『이따금 인근 도시의 국민학생들이나 대학생들이 견학을 오지만 지금까지 마을에 계신 몇몇 어른들 의에는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전해줄 수 없어 안타까웠어요.』
다부동·새마을부녀회장 정순덕씨(42)는 그래서 지난해12월 전두환 대통령을 만날 기회가 있을 때 전승기념관을 세워줄 것을 호소했다고 했다.
이 호소로 국방부는 이곳에 11월까지 5억3천만원을 들여 연건평 75평의 기념관과 높이24m의 전적비를 세우기로 하고 지난5월 공사에 착수, 현재 부지조성공사가 모두 끝났다고 탱크 모양을 본뜬 기념관은 외벽에 당시 유명했던 B-29기의 융단폭격과 각종지상전투를 부조(부조)하고 각종 자료를 비치할 예정이다. <칠곡=이창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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